“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브랜든 프레이저의 엄청난 연기와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지독한 연출이 만들어낸, 그야말로 괴물 같은 영화.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고 엄청나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덮쳐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이후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복잡해진 생각을 글로 정리하다 보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길어졌다. 마치 고래처럼.
하지만 이 정도 길이가 아니면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이 글도 이 영화의 일부분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걸 미리 밝혀둬야겠다.
고래는 즉각적으로 주인공 찰리의 거대한 몸집과 연결된다.
그 몸집은 정신적 피폐함이 초래한 것이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육체적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찰리는 게걸스럽게 피자를, 샌드위치를, 치킨을 흡입한다.
찰리는 지적인 에세이 강사인 동시에 탐욕스러운 욕망의 노예다. 포르노를 보며 자위도 하고, 엄청난 식탐을 보인다. 사랑에 빠져 가족도 버린 전적이 있으며,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딸이 보고 싶어 집으로 불러들인다. 그의 거대한 몸은 계속해서 육체를 의식하게 만든다. 영화는 시종일관 찰리를 연민하게 만들면서도 잊을만하면 그가 짐승같이 먹는 장면을 끼워 넣는다. 그가 욕망의 노예임을 잊지 말라는 듯이.
고래는 다시 찰리가 외다시피 하는 모비딕 에세이와도 겹친다.
그 에세이는 고래를 옹호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고래는 죄가 없고, 에이허브 선장은 고래를 잡아봤자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고 말이다. 찰리의 고래 같은 몸집을 생각하면 여기서 고래는 육체적인 욕망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 보인다. 에세이는 말한다. 육체가 원하는 걸 따라가는 게 뭐가 그렇게 잘못이란 말인가. 그걸 정복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아니, 뭐 하러 그걸 정복한단 말인가.
인간은 육체적 욕망과 그에 상반되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을 분리시키려는 ‘신神’의 존재가 있다. 마치 고래를 잡아죽이려는 에이허브 선장처럼 말이다. 그 신은 인간 이성과도 연결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존재. 성경 교리대로라면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모두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육체를 입고 있는 존재이기에 발목을 잡힌다. 우리는 죽는 줄 알면서도 피자와 치킨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 존재다. 까딱하다 기도가 막혀 죽을 걸 알면서도 씹지 않고 급하게 삼키는 존재다. 우리는 포르노를 보고 자위하는 존재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사랑 때문에 가족도 버리는 존재다. 인간의 이런 면은 이성적이지도 않고, 이상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모두 고래다. 찰리처럼 거대한 몸을 갖고 있진 않지만 육체의 무게는 언제나 우리를 압도한다. 때로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때문에 찰리나, 그를 보살피는 리즈나, 찰리의 딸 엘리 모두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구원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신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을 죽인다. 교회는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은 완전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인 성경을 두어 번이나 읽어봤지만 그것은 찰리를 육체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문제는 찰리가 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걸 실패한 그가 딸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딸의 구원은 그의 구원이다. 그는 아예 작정을 한 것처럼 보인다. 딸을 구원하기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한단 말인가.
육체를 입은 추한 존재이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여기서 찰리가 딸에게 취하는 행동은, 무조건 그를 긍정해 주는 것이다. 너는 아름답다. 너는 놀랍다. 너는 정말 멋있다.
이는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의 엄마에게서 듣는 딸의 행실은 사악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찰리는 자기 말대로 딸을 바라보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는 실제로 딸을 그렇게 바라보고 믿는 게 분명하다. 그에게 딸은 선하다. 그것이 오해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태도는 찰리가 그토록 거부했던 신의 모습을 닮아있다. 이 부분이 재밌기도 하고 묘해지기도 하는 지점이다.
기독교에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는 개념이 있다. 죄를 지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제물로 삼는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고 인간의 죗값은 모두 탕감 받는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즉시 탕감이 이뤄진다. 그때,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다’고 부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는 ‘죄’의 반대 개념이다. 하나님은 아예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아무 죄가 없는 존재인 것처럼 그 사람을 대하게 된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용서이자 사랑이다. 신이기 때문에 베풀 수 있는 자비다.
찰리가 딸에게 해주는 말은 마치 이 칭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것은 용서이자 구원이다. 그것은 딸의 죄를 더는 묻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딸에게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버림받았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던 어린 소녀는 아빠의 입으로 ‘아름답고 놀라운 존재’라는 말을 들으며 회복된다. 그리고 실제로 순식간에 그 말과 똑같은 존재로 바뀐다. 구원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구원은 인간의 힘과 의지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부모의 위치에서나 겨우 시도해 볼까 싶은 놀라운 경지다. 모든 부모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신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부모의 사랑이지만, 그런 부모도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찰리가 해낸다. 딸을 구원한 찰리는 마치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공중으로 떠오르고 빛 속에 휩싸인다. 그는 드디어 자신을 짓누르던 육체의 무게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신의 자비를 이야기로 풀어 보여주는 기독교 영화란 말인가.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온전히 이상적인 성경의 뜻을 보여주며,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교회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따진다. 사람들은 절망에 휩싸여 있고 도움을 바라고 있고 구원을 바라고 있는 동안, 교회는 도대체 어떤 사랑을 베풀었느냐고 호통친다. 차별과 가식으로 점철되어 신의 사랑을 왜곡하고 그저 사람들에게 죄의식이라는 무거운 짐만 지게 만든 것은 아니냐는 말이다. 그 죄의식 때문에 곡기를 끊고 죽음을 택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오히려 알량한 우월의식만 내세우고 있느냐는 것은 아니냐며 말이다.
교회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진실하게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 제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라고 찰리가 강의에서 했던 말처럼 말이다. 그것은 비기독교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누구보다도 기독교인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교회는 지금 자신에게 얼마큼 솔직한가. 아니면 아직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쓰레기 같은 에세이나 쓰고 있는가.
그들이 신에게 ‘칭의’를 얻었다면, 그것으로 인해 죄의식에서 벗어났다면, 교회가 할 일은 그 칭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지만 신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굳이 인간을 보낸다. 문을 두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한다. 아무도 거기에 관심이 없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구하는 과정이 자신을 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딸을 구하고 자신도 구원받은 찰리처럼 말이다. 또한 인간은 인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건지 모른다. 그것이 오해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때때로 그 모습은 고래처럼 거대한, 그리고 구역질 나는 모습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