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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Apr 19. 2023

앓느니 죽을 수는 없지.

‘앓느니 죽는다.’는 말이 있다. 끙끙 앓으며 죽어라 고생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편하다는 말이다. 죽는 걸 이렇게나 안 무서워하다니, 참으로 호기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은 내가 즐겨 쓰기도 했거니와, 나란 놈의 못된 성질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해서 애정을 가진다. 중간이 없이 ‘모 아니면 도’인 내 성격과 상통하는 것 같고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말과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귀차니즘과 무척 관계가 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내 몸은 내 것이니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왔다. 소유권이 내게 있으니 지가 고장 나는 것도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내 몸은 내 노예였다. 몸이 아프다고 투정하더라도 일일이 챙기는 게 귀찮아서 모른 척했다. 내 몸은 그런 내 성질머리를 일찌감치 이해하고 충직하게 나를 받들어 왔다. 몸을 함부로 굴려 뼈든 장기든 깨지고 부서져도 의사도 놀랄 만큼 빠른 회복력을 보였다. 돌이켜보니 참 과묵하고 성실한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언제부턴가 개별 태업을 하거나 수틀리면 집단 파업을 일삼았다. 오너인 나는 그럴 때마다 ‘이건 기세 싸움’이라 믿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것들의 요구를 조금씩 들어주면 나중에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누가 더 손해인지 두고 보자며 버티고 버텼다. 


'내 부모님이 힘들게 밤일해서 만들어줬더니, 이제 와서 파업을 해?'


가만 생각해 보니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시면서부터 파업이 잦아진 걸 보니 내가 창조주가 아니라 세습 경영주라고 무시하는 게 눈에 보였다. 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라고. 오기가 나서 파업을 하든, 몸이 안 움직여지든 냅두고 버텼다. 그러면서 따끔하게 경고했다.   

   

‘니들 잘 들어. 난 앓느니 죽는다. 내가 죽으면 니들도 끝이야.’       


그러자 이것들이 일단 꼬랑지를 내렸다. 다시 회복에 속도를 내고 가끔은 초과 실적을 내기도 했다.      


애인이 생겼다. 말 그대로 눈 떠보니 옆에 애인이 있었다. 남들처럼 썸 타고 밀당하는 과정도 없이 그냥 생겨버렸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느낀 건데, 귀찮은 거 싫어하고, 자존심은 센데 허당끼 다분한 것 등, 그녀와 내가 여러모로 닮았다는 것이 금세 연인 된 이유인 듯하다. 예민하고 생각이 많아서 불면증을 앓는 것까지 닮았다. 허세도 없고 긍정의 화신이라는 것만 빼면 거의 모든 면에서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녀와 나는 체질이 완전 달랐다.) 그녀가 수면 장애로 고생할 때 난 그녀를 생각한답시고 내 수면제를 나눠줬다. 정확히 나다운 방식이었다. 물론, 당연히 당장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계속 수면제를 복용하다 그녀도 나처럼 만성 불면증을 앓게 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지만, 나도 멀쩡히 사는데 별 문제 있으랴 싶어서 그냥 내버려 뒀다. 내 몸 대하듯 그녀 몸도 내 맘대로 여긴 건지, 그녀와 나는 닮았으므로 그래도 된다고 내 멋대로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이래저래 몸이 안 좋다며 한의원을 다녔다. 한의사가 수면 장애도 해결해 주고 기타 만성질환까지 고쳐주겠다고 했다길래 코웃음을 쳤다. 내가 수면제를 끊으려고 수년간 백방으로 뛰어다녔는데 아직도 못 고쳤구만, 다짜고짜 고쳐준다니 참으로 오만한 의사군 싶었다. 내가 코웃음을 친 이유는 더 있었다. 기껏 침 몇 방 놔주고는 뭐는 먹지 마라, 뭐를 먹어라 했다나? 그럼 난 뭐를 잘 안 먹고 뭐를 너무 먹어서 불면증과 만성질환이 생겼단 말인가? 자고로 사람은 음식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어야 한다는 건 진리 아닌가? 난 살면서 음식 가리는 놈 치고 건강한 놈 못 봤다. 


헛웃음 지으며 의사가 만들어준 그녀의 식단표를 훑어봤다. 경악을 했다. 이건 뭐, 먹지 말라는 것 천지였다. 고기도 안 돼, 콩도 안 돼, 우유도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대체 뭐 먹고살라는 건지, 죄다 X 표시가 된 표를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중 압권은 밀가루였다. 거기엔 X가 두 개나 그려져 있었다. 지금 세상에 밀가루를 안 먹을 방법이 있단 말인가? O가 그려진 건 오로지 풀떼기뿐. 이 사람이 의사가 맞긴 맞나 싶은 대목이었다. 염소도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풀떼기만 먹고 산단 말인가? 어이없어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듯 진지했고, 체념한 듯 태연했다. 설마 이걸 다 지키려고 그러나 싶어 내가 불안했다. 이렇게 먹고 살다간 현기증 나 걷다가 쓰러지거나 어찌어찌 살아남아도 나이지리아 난민처럼 뼈만 앙상하고 배만 볼록한 여자가 될 거 같아서 내가 어질어질했다. 설마 했다. 같은 인간으로서 정말 저걸 다 지키고 살지는 않겠지, 몰래몰래 빵도 먹고 이불 뒤집어쓰고 육포라고 뜯겠지 했다.  

    

그녀가 그 미스테리한 한의원에 다닌 지 한 달이 돼간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 황당한 식단표를 철저히 지키며 살아내고 있다. 나와 데이트하면서도 진짜로 풀떼기만 먹는다. 그런데 전보다 더 쌩쌩하다. 풀만 먹고도 나보다 더 오래, 잘만 걷는다. 신기했다. 만성 질환도 나아졌단다. 아, 사람도 풀만 먹고 살 수 있었구나. 고차원적 우주의 이치를 깨닫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수면제 없이 잘도 잔다는 말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이상한 열패감에 휩싸였다. 오랜 세월 동안 수면제에 의지하고 또 그걸 끊으려고 정신과 병원 수 십 곳을 헤맨 나는 대체 뭔 짓을 한 건가 싶었던 것이다. 


오래된 친구 놈을 만났다. 녀석은 나보다 훨씬 더 술을 사랑하는 놈이었다.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볼 때마다 건강해지는 놈이었다. 녀석의 건강 비결은 그저 아침 산행뿐이었다. 녀석은 날 만날 때마다 산에 가자고 졸랐고 그때마다 난 산은 보라고 있는 거지 오르라고 있는 거 아니라며 피했다. 그러다 이참에 궁금해서 내가 물었다. 대체 산을 왜 그리 열심히 오르냐고. 녀석은 아주 간단 명쾌하게 대답했다. 술을 더 많이, 나이가 더 들어서도 마시기 위해 그런다고 했다. 아, 이런 심오한 철학이 있었다니. 녀석이 달리 보였다. 녀석의 말에는 단순한 듯 복잡한 뜻이 담겨 있었다. 건강을 위한답시고 좋아하는 술을 끊긴 싫고, 많이 오래도록 마시기 위해 건강해야 한다는, 나 같은 애주가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반가운 철학이 숨어 있었다. 그렇지!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한 순간 자빠져 술도 못 먹는 인생은 얼마나 퍽퍽한가. 그날 우린 3차까지 마셨다.

      

나도 그 미스테리한 의사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 결심을 하기까지 쉽지는 않았다. 그러려면 우선 내게 반기를 들고 집단 태업을 일삼는 몸과 타협해야 했다. ‘니들 요구를 들어주겠다. 다만, 이건 오로지 내 애인 때문이다. 그녀가 빌빌대는 나를 싫어할까 봐 그런 거지 내 고집이 꺾여서 그런 거 아니다.’라고 분명히 생색을 내놓고, 이제부터 니들도 내가 원하는 만큼 술을 먹을 수 있도록 빠른 속도로 건강해질 것이며, 체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한의원을 찾았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무척 불안했다. 


‘나도 풀떼기만 먹으라고 하면 어쩌나.’ 


풀떼기를 안주로 먹는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국수라면 환장하고 된장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더러 밀가루, 콩 이딴 거 먹지 말라면 그건 천벌이나 마찬가지인 거였다. 그녀에게 아무 핑계나 대고 도망갈까도 생각했다. 당장 불편하지 않은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거 아닌가 싶고 불편을 자초하는 짓 같아 그곳에 앉아 있는 나를 자책하기도 했다. 망설이다 보니 어느새 의사 앞에 앉아있었고 의사는 불면증은 물론이고 현재보다 훨씬 건강한 몸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두고 볼 테니 어디 한 번 잘해보쇼’라는 눈빛을 던지고 나왔다. 

      

세 번의 침을 놓고 세 번째 맥을 잡은 의사에게서 드디어 식단표를 받았다. 기쁨과 슬픔, 안도와 경악이 교차했다. 고기는 좋대서 기뻤다가 술안주에 딱 인 해물은 안 된대서 절망했다가 콩, 된장은 좋대서 안도했다가 잎채소는 안 된다며 배추김치 말고 무김치 먹으래서 경악했다. 뭐랄까. 반 주고 반 얻는 기분이었다. 멍해질 만큼 슬펐던 건 그녀와 내 식단표가 완전히 정반대라는 사실이었다. 마치 의사가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몇 개월 계획했다 해도 이보다 정교할 수는 없다 싶을 만큼 철저히 정반대였다. 마늘 한쪽도 마저도 완전히 정반대였다. 무슨 하늘의 장난도 아니고, 믿기지 않았다. 

      

사실, 한 달여 동안 대개 그녀의 입맛에 맞춰 식사를 했다. 해물위주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셨다. 그럼에도 난 좋았다. 술에는 또 해물이니까. 그러다 그녀의 배려로 가끔 고기를 먹는 날엔 또 그래서 좋았다. 고기 없이 어떻게 험한 세상 헤쳐 나가겠나? 그러나 이제, 완전히 정반대의 식단표를 들고 있는 나는 어느 식당에 가서 뭘 먹어야 할지 실로 막막했다. 그래서 의사에게 물었다. 그녀와 난 어쩌면 좋으냐고. 그러자 의사는 참으로 명쾌한 해답을 내놨다. 메뉴 선택의 폭이 넓은 식당엘 가라고. 음.. 역시 의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병원을 나선 우리는 고기 집엘 갔다. 그녀는 내 체질에 고기가 좋다는 결과에 나보다 더 기뻐하며 한턱 쏘겠다고 했다. 난 소고기는 동그라미 두 개, 돼지고기는 세모라서 소고기를 시켰다. 노릇하게 구워진 소고기가 내 앞 불판에 잔뜩 놓였고 그녀 앞에는 상추와 깻잎이 잔뜩 놓였다. 내가 고기를 우걱우걱 씹는 동안 그녀는 상추에 파김치를 얹어 입 한가득 욱여넣고 맛있게 오물거렸다. 좋아하는 해물을 포기해함에 억울해 한 내가 부끄러웠다. 길거리에 천지인 그깟 풀떼기에 저렇게 행복해하다니, 가슴이 미어졌다. 주인장은 아마도 나를 고기는 혼자 다 처먹고 여자에게 풀떼기만 먹이는 천하의 몹쓸 놈으로 봤을 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렇게 풀 한 바구니를 다 먹어치운 그녀는 점원에게 풀 한 바구니를 더 부탁했다. 실로 전생에 염소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열심히 먹어댔다. 

     

‘아, 다들 건강에 저리도 진심이구나.’      


또 부끄러웠다. 


우린 푸짐한 한 상을 사이좋게 나눠먹고 배를 두드리며 거리로 나왔다. 그녀가 말했다.      


‘만약 김치찌개를 먹게 되면 당신은 고기만, 난 김치만..’      


감탄했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인가? 그때부터였다. 지금까지 맨날 보던 거리의 식당 메뉴가 달리 보인 것이. 정반대 체질인 두 종족이 함께 할 식사메뉴를 읽으며 앞으로 갈 곳을 순서 지어 보았다. 생각을 바꾸니 갈 곳이 엄청 많았다.

        

그 사이 변한 나를 발견했다. 침 세 번 맞고 갑자기 건강해졌다는 게 당연히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나? 그간 내 몸에 한 짓이 있는데? 그냥 몸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나란 놈에게는 대단한 변화였다. 그동안 주위 사람들이 조금만 몸에 이상 신호가 잡혀도 바로바로 병원을 찾거나 조금이라도 나은 컨디션을 찾을 때, 나는 방치하고 알아서 낫겠지 하며 살았다. 아파도 깡다구로 버티는 게 습관처럼 돼버렸고 계절 독감 따위에 한 번도 걸려 본 적 없는 내 몸을 고마워하기는커녕 당연시하며 자만했다. 약 없이 낫는 내 몸에 멍청한 자부심 같은 게 있을 정도였다. 남들 아플 때 안 아프니 내 몸을 과신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나이 들고나니 아프면 대충 아프지 않고 심하게 아팠다.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몸이 하는 말에 굴복하기로 했다. 젊을 때 마냥 오기 부릴 처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장기부터 근육까지, 이것들이 아우성을 치면 내가 먼저 급사과하고 약을 털어 넣고 온몸에 파스를 붙이기로 했다. 의사 말을 반만 믿고 반은 안 믿는 고집도 꺾기로 했다. 귀찮다고, 앓는 게 싫다고 죽을 수는 없지 않나 싶어서, 또 늘그막에 달리 도리가 없으니까. 그녀와 걸으며 먹는 것만으로도 건강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고로 제 회사 키워 준 노동자 무시하는 기업이 잘 되는 꼴 못 봤으므로, 그간 혹사시켰음에도 멀쩡히 살게 해 준 내 몸에 고마워하고 이것들이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이좋게 지내기로 극적 타결을 봤다. 내 몸인데 어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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