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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Jul 22. 2023

‘그때 노래가 좋았지' 란 말.

예술을 생각하며..

내가 유독 내 사춘기와 청년시절의 음악에 편중된 취향을 가졌다는 걸 안 지 오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히 개인의 추억 때문인 줄만 알았다. 그 시절의 향수가 곡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되어 요즘 노래에 편견마저 조장한 줄 알았다. 삭막한 어른이 된 지금에 반해 그 시절엔 일상의 대부분이 음악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이 들면서 삶에 찌들다 보니 작은 음악에도 요동치던 심장이 굳어져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결국 음악적 감수성이 '그때'에서 진화가 멈춘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뭔가 찜찜했다. 어딘가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계속 남아 있었다. 중년이 즐길만한 음악과 공간이 없는 건 아닐까? 이러저러한 궁금증을 갖고 있던 중 ‘그때 노래가 좋았지’란 말을 어느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음악 평론가가 한탄하듯 내뱉는 걸 보았다. 50대 중반이었던, 나와 동시대를 산 그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 나는 다시 한번 혼자 그 의미를 추측해 봤다. 평론가라면 음악 산업전반에 관한 문제의식 정도는 있을 테니 어쩌면 방송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나름의 인식이 있었던 건 아닐까? 평론가라는 직함이 주는 무게감이 내게 어떤 힌트를 주었는지 그 후로 꽤 오랫동안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작금의 내 무딘 음악 감성에 관해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리고 개인적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 역시 엄연히 있음을 깨닫게 됐다. 당연히 데이터 마이닝 따위가 있을 리 없고 수년 전부터 유행곡의 리메이크가 유독 '그때-내가 사춘기 또는 청년 시절인 80,90년 대'의 곡에 편중돼 있는 것 정도가 근거라면 근거겠다. 뻔한 소리지만, 누구나, 어느 노래나 다 그렇진 않겠고. 

      

회상하면, 확실히 ‘그 시절’ 가수들의 음악은 다양하고 깊었다. 원곡이 헛갈릴 만큼 리메이크가 유행인 작금의 상황이 단순히 주기적인 복고 유행이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당시 작곡가들은 깊은 감성을 길어 올리기 위해 고뇌하고 사색했으며 예술적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수들은 그런 곡에 녹아있는 깊이 있는 감성을 읽을 줄 알았고, 그 감성을 순수한 목소리와 정직한 창법으로 대중에게 전달했다. 누군가 색다른 곡으로 히트하면 다른 가수는 더 다른 곡을 내놓았다. 그들에게 있어 무기는 곡 자체가 가지는 고유한 호소력과 그들의 가창력, 그리고 순수한 전달력이었다. 때론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대중은 그들의 순수한 음악적 열정에 화답했다. 음악이 예술일진대 예술이 어찌 완성도만 중요하겠는가. 그 끓는 순수한 열정이 부족한 완성도를 예술이라 여기게 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그때’는 다양한 장르와 색다른 실험이 늘 대중과 교감을 시도했고 각자 음악적 독창성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그때 가수들은 오로지 자신의 음악성이라는 민낯으로만 호소했던 것이다. 대중 감성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순수에의 동경은 변하지 않기에 대중은 그 순수성에 흔쾌히 지갑을 열었고 뜨겁게 호응했다. 미디어의 힘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때’ 뮤지션은 가공된 음악보다 생음악을 진정성 깊게 들려주고 싶어 했고 우리는 화려한 무대매너보다 음악적 깊이를 화면 밖에서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서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관람 후 버스비가 없어 밤새 걷더라도 허리춤엔 ‘워크맨’이나 ‘마이마이’가 있어서 힘든 줄 몰랐다. 돌이켜보건대, 대중도, 음악인들에게도 음악 르네상스 시대였다. 

     

지금 양산되는 노래들은 상업적 공정과 계획적 호소만 있다. 그런 공정을 거친 노래는 잘 빠진 노래일지언정 생명력이 짧다. 산업 미디어와 결탁해 노출된 노래는 곡 자체의 질보다 기획사의 기획에 따라 흥행이 좌우되며 CM 송처럼 그저 자주 노출돼 각인만 되면 히트곡이 된다. 기획사의 치밀한 계획대로 대중은 곡 자체의 음악성을 보기보다 미디어에 노출된 가수의 무대력, 외모, 언변, 가십 등 연예성에 따라 움직인다. 어느덧 한국 대중음악 장르는 걸그룹, 보이그룹이 아예 장르 아닌 '장르'가 돼 편중에 편중을 거듭하게 됐다. 음악시장은 잘 팔릴 곡들만 생산하고 미디어는 돈이 될 만한 곡들만 반복적으로 노출시킨 결과 길거리엔 이곳도 저곳도 같은 음악만 들리게 됐다. 그 결과는 음악의 주 소비층인 십 대, 이십 대들의 협소한 음악적 상상력과 소구로 나타나게 됐고 이제 음악을 사업으로 여기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굳이 다양성을 갖출 필요가 없게 됐다. 귀보다 눈을 즐겁게 할 춤과 관심을 쏠리게 할 노이즈 마케팅 등 흥행 이벤트만 잘하면 잘 팔리는, 음악성보다 광고만 잘하면 히트 상품이 되는 ‘제품’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과 대중의 취향이 시장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음악 차트가 개인과 대중의 취향을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주 소비층인 십 대, 이십 대의 음악 감수성을 만든 장본인은 미디어와 미디어 앞에 을을 자청한 뮤지션들이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사달의 원인 제공자 이수만이 있다. '국익'이란 단어 앞에 다양성을 박살 낸 국가 정부 앞에 가수를 공산품화 시켜 음악을 예술이 아닌 산업으로 인식하게 만든 이수만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목적으로 사업을 한 이수만을 욕할 순 없겠다. 70년대 저항의 상징이던 포크의 대열에 있던 ‘가수 이수만’이 그 이력을 밑천 삼아 자본의 전사가 된 것을 두고 지금은 극우가 된, 한때 운동권이었던 386 정치인들을 변절이라 하듯 그도 변절자라 부르고 만다 하더라도, 그러나 아직도 음악시장의 ‘시장화’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욕하지 않을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음악의 시장화에 대문을 열었다고 해도 다른 음악가들이 독자적 노선을 유지했으면 그나마 풍성한 문화적 기반이 형성됐을 테지만, 누구나 돈을 좇았고 미디어와 무대는 돈 되는 가수에게만 문을 열어줬다. 그 결과 지금, 음악성과 실험정신의 상징인 서태지와 한 그룹이었던 걸 믿기 어려운 yg와 곡 보다 춤으로 히트한 jyp는 스타트 업을 꿈 꾸는 청년들의 꿈이 됐으며, 소속 가수들은 스타를 꿈꾸는 청소년들의 꿈이 됐기에 다시 이수만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영화판도 음악판과 다르지 않다. 극장에서 재밌는 영화는 많아도 좋은 한국영화는 찾기 힘들다. 한 영화가 흥행을 하면 이후 영화들은 그 구성과 기법 등을 모방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창작의 영역에선 그게 매뉴얼화되면 곤란하다. 짧은 기간이더라도 반복적 모방은 정형화되고 반복된 정형화는 반드시 신파가 된다. 그러니 흥행 보증수표인 누군가가 잇달아 만든 영화들이 정형적 방식으로 관객을 끈 것 또한 관객의 눈높이를 하향 표준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대중가요 판에 이수만이 있다면 영화판에는 강우석이 있다. 그는 어떤 소재도 신파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실미도 같은 영화적으로 귀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사건이 주는 역사적 의미와 시대의 아픔 따위는 오감을 자극하는 영화적 장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영화가 한국영화 첫 천만을 기록하는 바람에 여타 감독들이 5.18 같은 역사적 사건도 상업적 소재로 전락시키는데 앞 다퉜고 수년간 5.18을 소재로 개발 중이었던 작품성 있는 시나리오가 한꺼번에 휴지가 된 건 충무로 판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건’이다. 누군가는 관객의 몫 아니겠냐고 한다면, 시장논리만 있는 세상에 예술은 설 자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획일화된 영화만 걸리는 극장가에서 관객이 영화적 감성과 시야를 넓힐 기회는 그만큼 적어지지 않겠는가? 그가 흥행을 목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 또한 죄는 아니지만 이후 지금까지 충무로의 큰 손이 된 제작자 강우석 손에서 나온, 주인공과 소재만 다른 수많은 팝콘 영화가 음악판에서의 미디어와 다를 바 없는 극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음악시장과 판박이다.

      

작은 바람이지만 난 그들이 자신이 장사꾼임을 인정하길 바란다. 그게 아직 예술적 소명의식을 저버리지 않은 후배들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일 테니까. 대중의 입맛에 맞추었다고 항변한다면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대중의 입맛을 마비시킨 장사꾼인 것을 인정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자본의 전사들이 그럴 리 없고, 결국 우리는 지금 고군분투하고 있는 인디뮤지션들에게, 독립영화인들에게 하다못해 맥주 값일지언정 기꺼이 지갑을 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라기보다 우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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