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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04. 2023

아이와 성당에 다니는 기쁨


얼마 전부터 작은아이와 성당에 다닙니다. 저는 오래된 신자고 아이는 새롭게 교리 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았어요. 주변에서 다들 부러워해요. 보통 중학생이면 잘하던 종교 생활도 멈추게 되는 시기인데 거꾸로 중학생이 뒤늦게 신앙에 입문한 게 신기하다고 덧붙이면서요.

아이 말로는 '성당 다니는 친구들 중에 괜찮은 친구들이 많고, 엄마가 종교생활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라고 합니다. 물론 저는 신앙생활을 강요한 적이 없어요. 그냥 제가 꾸준히 다니고, 성당 갔다 오면 설거지하며 흥얼흥얼 성가 부르고 그랬습니다. 성당 다녀온 엄마 얼굴이 환해지는 게 아이에게도 좋아 보였나 봐요.


중학생이 일요일 아침마다 늦잠도 못 자고 6개월간 교리공부하느라 애썼지요. 이제 아이와 매주 성당에 갑니다.


한 번은 그 주일 말씀이 마태복음 20장 1절에서 16절이었어요. 포도밭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꼴찌가 으뜸이 될 수도 있고, 으뜸이 꼴찌가 될 수도 있음을 강조하셨지요. 신부님이 이 성경 말씀을 두고 강론을 하셨습니다.

혹여 지금 잘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벌 받는다는, 그런 엄포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하시며, 자기가 지닌 것을 혼자만 움켜쥐려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하셨어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본받아 내가 지닌 걸 이웃과 나누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고요. 우리가 으뜸이 되더라도 그것이 혼자 이룬 것이 아니며 이웃과 나눠야 한다는 거예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성당이 아니면, 종교가 아니면, 요즘 누가 이렇게 가르쳐 줄까? 아이들한테도 온 세상이 나서서 그저 경쟁에서 이기고 승자가 되라고만 가르치고 있잖아요. 성당에 와서 '베풀고 나누라'는 강론을 아이와 같이 들어서 안심이 됐습니다.


언젠가부터 '다 함께 잘살자'라는 당연한 지향과 이상에 대해 지나치게 날을 세우는 이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부동산 광풍이 몰아칠 때였어요. 너도나도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어서였을까요. 특별하게 큰 재산 챙겨놓은 것도 아니면서 재테크에 별 관심 없이 사는 게, 어쩐지 주부로서 직무유기를 저지르는 것 같고 불안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부동산 카페를 들락거렸는데 익명의 온라인 공간이지만 제 입장에선 너무 서늘한 말들이 오가서 지켜보기가 힘들었습니다.


특히 '다 함께 잘살자'야말로 공산당 같은 소리라고 비난하는 이들을 자주 봤어요. 모두가 똑같이 행복하고, 똑같이 잘사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지요. 그래도 나만 풍족한 것 말고, 우리 사회가 대체로 여유롭게 사는 것에 대한 마음속 이상향은 지니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이상 자체를 비난하는 목소리에 당황스러웠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두고 한 지역신문에 난 기사를 봐도 알 수 있어요. 지역신문 기자는 이 영화를 두고 “결국 다 함께 잘살자고 하는 건, 불가능하고 허울뿐인 구호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갸우뚱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기자 분인데 어떻게 이 영화의 메시지를 이렇게 읽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감독이 직접 “제로섬으로 사는 사회의 끝은 무엇일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되면 좋겠다”라고 했잖아요. 승자 독식 사회의 끝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자는 건, 그 사회의 미래가 여러 면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전제하는 거죠.



영화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을 보여주거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아름답게 투과되는 장면을 인물들에게 비추는 등 꽤나 드러내놓고 주제를 구현하고 있는데 그조차도 보지 못하다니. 우리 사회가 너무나 평등해서 그런 가치는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시각을 지닌 이들이 많아진 걸까요?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김누리 교수님이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밝혔듯이 우리나라는 세계에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평등이 심각한 나라입니다.

프랑스 파리 경제대학 '세계 불평등 연구소'의 연구 결과, 한국이 세계 불평등 1위를 차지했어요.(2022년) 가장 심각한 건 부동산 불평등으로, 상위 1%가 55%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상위 10%가 96.4%를 소유하고 있어요. 나머지 90% 국민이 3.6%를 소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몇 년 전에도 집이 모자란 게 아니라 지나친 소유가 문제라며 한 명이 1천여 채의 주택을 소유했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지요.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약자들 때문에 '역차별'이 생겼다며 더 기계적인 공정으로 가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이들이 많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이 <손 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에서, 진화는 손 잡는 것을 거부하는 이기적인 집단이 아니라, 기꺼이 손 맞잡은 집단이 적응하고 살아남은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어요.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를 두고도 사람들은 '역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며 그게 당연해'라고 마음대로 해석하지만 도킨슨은 제목에서 중요한 건 '이기적'이 아니라 '유전자'라고 했어요. 유전의 단위가 종이나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임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거예요. 원래는 <불멸의 유전자>라고 제목을 지으려고 했다고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요. 결국 제목은 <이기적 유전자>라 정해졌는데 이 제목 때문에 사람들이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인간의 사회적 이기심과 혼동했고, 도킨스는 이런 현상을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세례를 받지 않은 큰아이도 성당에 따라온 적이 있었어요. 미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말하더군요. 신부님이 '하와이 큰 산불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라고 하는 순간 뭔가 뭉클했다고.


"엄마, 우리가 어디에서 이렇게 바다 건너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함께 모여 걱정하고 기도하겠어? 나는 무신론자에 가까워서 동생처럼 세례를 받거나 종교를 쉽게 갖기는 어렵겠지만 이렇게 사랑과 공존을 강조하는 가르침은 너무 좋고 이 시대에 이런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상생이나 연대를 말하면 나약한 사람들의 위선인 양 몰아가는 사람들이 많지요. 강자를 숭배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것이 정의인 양 착각하면서요. 그러나 한편에서는 여전히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며 그 존엄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손잡아야 하고, 서로 위해야 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어서, 저도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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