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이 오래된 동료 강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내 강의를 듣고 반응이 너무 좋다면 우연히 나와 잘 맞는 청중이 왔던 것이고, 반대로 내 강의에 별 반응이 없었어도 마찬가지로 우연히 나랑 잘 안 맞는 청중이 왔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요.
강사는 매 순간 평가받는 직업인데 매번 달라지는 반응에 일일이 동요하면 버티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더 좋은 강의를 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것과 각인각색, 다 다를 수 있는 반응에 일일이 맞추려 드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요. 그러면 내 강의가 없어진다고요.
며칠 전 연달아 학부모 강의를 했는데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독서교육에 대한 강의였는데 첫날 온 학부모님들은 입을 모아 "독서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조바심에 책 갖고 애를 채근하기만 했는데 반성했다", "꿀정보와 꿀팁이 쏟아져 나와서 너무 좋았다" 등등, 소감을 말씀하시고 강의가 끝난 후에도 단톡방에 연신 감사하다고 쓰셨어요.
잔뜩 고무되어 다음날 같은 강의를 했는데 첫날처럼 좋은 반응을 주신 분도 있었지만, "어떻게 하면 문해력을 높일지 그 방법을 알고 싶어서 온 거였다"며 뭔가 아쉽다는 듯이 말씀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책육아" 붐이 불기 시작한 지 어언 20년이 넘었는데 왜 한국의 성인 독서율은 거의 세계 꼴찌가 되었는지, 우리 독서교육의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종합적으로 되짚어봐야 한다고 말씀드리며 시작한 이야기가 그분에게는 썩 다가오지 않은 눈치입니다. 여전히 문해력을 높여 시험성적을 잘 나오게 하는, 책 읽기의 즉각적인 효과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았습니다.
강사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반응보다 부정적인 피드백이 더 신경 쓰이는 법이어서 돌아오는 길이 좀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강의가 늦은 시간에 있어서 저녁도 못 먹고 2시간 열강을 했는데 그분의 말이 자꾸 떠올라서 허탈하기까지 했습니다.
독서를 향한 부모들의 기대치는 어차피 따로 있는데 혼자 입바른 소리해봤자 공허하게 들리는 건 아닐까, 회의도 들었습니다. 혹시 내가 시대를 못 따라가는 걸까, 서글픈 생각도 들었고요.
지난해 제 강의 만족도가 기관에서 3위 이내에 들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기대한 바와 다른 것 같다는 학부모님 한 분의 표정이 저에겐 훨씬 강력하게 다가오나 봅니다.
"고전을 읽으면 똑똑해지고 사회에서 성공한다", "책 많이 읽은 아이가 사회성도 좋고 친구도 잘 사귄다", "책을 읽어야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다", 책육아를 둘러싸고 20년 전부터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한때는 저 또한 이런 말들에 휩쓸려 빠듯한 살림에 무리해 가며 전집을 들이고, 아이 친구들까지 불러서 현란한 독후활동을 해주며 책 읽기에 온 열정을 쏟아부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이만큼 키우고 보니, 책을 두고 학습 성취를 절대 보장한다는 식으로 쏟아내는 말들은 약장수의 허왕한 주장처럼 느껴집니다. 독서마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책 읽으면 성공한다로 귀결되는 광고는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독서의 효용이란 눈에 보이는 아웃풋으로만 측정할 수 없으며 훨씬 더 깊고 풍부합니다.
<말하기 독서법>을 쓴 김소영 작가는 "아이가 책을 읽는 것은 어떤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자기다움이 곧 아이에게 힘이 됩니다. 그 힘은 자신은 물론 서로를 지키며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건강한 힘"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다 필요 없고 당장 내 아이 성적을 올려줄 독서 비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님께, 저는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을 공허한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오늘도 독서를 언급하는 다양한 광고를 봅니다. 그 광고에 현혹되어 또 책 갖고 아이들하고 실랑이 벌이며, 책 갖고 싸울 부모님들이 떠오릅니다.
EBS 다큐멘터리 <책맹인류>에서 나왔듯이 대부분의 아이들이 "책을 강요"하는 것 때문에 책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건만 독서교육 강사로서 이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건지, 그렇다고 작은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좀처럼 결론을 내기 어렵습니다.
독서교육할 때 저는 "강사"로서 청중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떤 책을 쓴 "작가"라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토크나 글쓰기 수업처럼, 이미 저에 대한 호감을 갖고 오시는 분들과 독서교육 청중의 온도는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명의 작가일 뿐인데도 북토크에 오시는 분들은 김영하 작가의 표현대로 "따듯한 눈"으로 저를 바라봐 주십니다. 이렇게 강사로서 환대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는 차라리 본업인 작가에 더 충실하자는 생각도 듭니다. (작가라고 결코 더 쉬운 일도 아니고, 대단한 환영을 받노라 말하기도 어려운 처지인데 말이지요.)
맥 빠지는 기분으로 수강생들 단톡방을 정리하다가 얼마 전 한 분이 따로 보낸 개인톡이 남아 있어서 보게 됐어요.
"선생님, 독서교육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오늘 강의 듣고 마음이 꽉 찼어요. 혼란스러웠는데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구나 싶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독서가 명문대 합격 보장의 수단이자 아이들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인양 쏟아지는 과대광고 속에서도, "진짜 독서"가 뭔지 고민하는 학부모님이 어딘가에 계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책이 우리 아이들을 공부 잘하라고 몰아붙이는 도구가 아니라, 각자의 결대로 꽃 피고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정한 친구로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