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입니다! 정은임 아나운서 추모 20주기를 맞아 특별제작한 "여름날의 재회" 방송이 라디오에서 오늘 저녁 6시부터 2시간 진행되고, 공개방송 실황은 밤 11시에 방송된다고 합니다.
대학 때 한 기업의 사보에 원고를 쓰던 학생기자 시절이 있었습니다. 동료기자가 정은임 아나운서를 인터뷰했는데 "차가운 유리벽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며 인터뷰하는 동안 떨렸었다고 하더라고요. 막상 기사 내용을 보니 '무척 치열하게 사는 사람 같아. 하지만 마음은 또 되게 따듯한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정은임 아나운서는 주류 영화를 홍보하기보다는 완성도와 예술성 높은 영화와 영화인을 발굴하는 데 공을 들여서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문민정부 시대였다 해도 영화 "파업전야" OST라며 대범하게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인터내셔널가>를 방송에 내보내기도 했고요. 실제로 노조 결성을 안 하겠다는 서명을 거부하고 MBC 노동조합 여성부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방송을 통해 사회참여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굉장히 팬이 많은 인기방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95년에 폐지되었고 이후 유학길에 올랐다 돌아온 방송에서 우리에게 잊히지 않는 오프닝 멘트를 들려줍니다.(정 아나운서는 모든 오프닝 멘트를 직접 썼었요) 바로 한진중공업 전 노조위원장이었던 김주익 씨의 자살과 관련한 멘트였습니다. 김주익 노조위원장은 헌법에 보장된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8억 손배 가압류가 집행되어 월급으로 13만 원을 받았고 129일간의 고공 농성을 벌이다 스스로 생명을 끊었습니다.
“새벽 3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아마도 또 밉보였는지 청취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은 6개월 만에 다시 폐지됩니다. 마지막 방송에서 정 아나운서는 청취자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챙겨 부르며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였다고 합니다. 그날 오프닝에서 낭독했던 시가 나희덕의 서시였어요.
나희덕/서시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돌아오지 못한 길을 간 지도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 아나운서는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다고 스스로 자조했는지 모르지만, 이토록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이 세상을 향한 그의 치열하고도 따듯한 응시를 그리워하는 걸 보면 그의 바람은 비교적 이루어졌던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만 김주익 씨의 죽음 이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쟁의행위에 대한 기업의 무분별한 손배 소송을 막는 내용의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은 아직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으며, 권력자의 입맛대로 길들여지는 방송을 온몸으로 거부하다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던 고인 앞에 여전히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방송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