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 Nov 05. 2024

<대도시의 사랑법>을 본 어른의 감상법

사실 볼 생각이 딱히 없었거든요. 너무 트렌디한 느낌의 제목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졌어요. 상큼 발랄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라면 굳이 찾아서 볼 생각이 없었어요. 제 젊음이 별로 상큼 발랄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젊은이들이 솜털처럼 가볍게 사는 이야기에 썩 공감이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작은애가 너무 적극적으로 권하는 거예요. 꼭 보라고. 작은애가 그렇게 강하게 뭘 권하는 일은 잘 없어서 저녁 늦게 보러 갔습니다. 좌석 뒤에 앉은 커플이 영화 초반에 자꾸 떠들어서 신경이 쓰였는데, 어머나, 언제부턴가 뒤에서 누가 떠들건 말건 너무나 집중해서 보게 되는 거예요. 떠들던 커플도 나중에는 몰입해서 조용히 보고 있더라고요.


그들의 20대를 보는데 왜 이렇게 저의 20대가 생각날까요? 하나도 안 닮았는데요. 저는 클럽 같은 데 가본 적도 없고, 당시만 해도 시대와 사회가 대학생들에게 그림자를 드리워서 자주 우울한 얼굴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충우돌하고, 방황하고, 실수하고, 불안해하던 청춘의 그림자가 똑같이 보이고 삶의 무게가 다르지 않다 느껴졌어요. 그때는 볼품없이 바닥에 떨어진 조각난 젊음 같았는데, 돌아보니 그 자체로 찬란했다는 것도 알겠고요.



부커상 수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저력 있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덕인지, 명대사도 많았습니다. 특히 "나도 나를 다 모르는데.. 다들 어떻게 그렇게 쉽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에 대해 다 안다고, 내가 뻔하다고 떠들지?"라는 대사에 머리를 한 대 맞는 느낌이었어요.


어른이 된다는 건 질문이 없어지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랑한다는 말보다 보고 싶다는 말이 진짜 같아. 사랑은 추상적이지만 보고 싶다는 건 확실하니까"라는 말을 들으며 "사랑"이 뭔지 생각해 본 적이 대체 언제였던가 싶었습니다. 무엇이 진짜 삶일까, 얼핏 얼핏 스쳐가는 일상에서 생각은 해보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활의 파도에 떠밀려 그런 질문들은 맥없이 뒤로 밀려났습니다.


나이 들어서 사람들이 하게 되는 질문은 대체로 이런 거예요. "아침에 소변을 누려면 힘을 줘야 하는데 병원에 가봐야 할까요?", "평생 혼자 살았지만 남은 인생까지 혼자 살 생각을 하니 겁나는데 어쩌죠?", "친정엄마가 치매가 심해져서 요양원에 모셔야 하는데 안 가시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타 등등.


그 또한 삶이고 우리 인생이죠. 이상한 건 이런 질문만으로 머릿속이 꽉 찼을 때는 답을 내기가 어렵고, 삶이 더 버겁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인생 후반전에 들어서면 과거와는 달리 조금의 우아함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적인 과제로 압도당할 것 같은데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질문들이 삶에 생동감을 줍니다. 필립로스가 <에브리맨>에서 “대학살”이라고 표현한 노년이 조금 덜 두려워집니다.


한지혜 작가의 <참 괜찮은 눈이 온다>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한다고 했어요. 영화를 보고서 이 문장이 떠올랐어요.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나를 모른다."

"나는 자식을 모른다."

"나는 사랑을 모른다."

"나는 인생을 모른다."


모른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비로소 제대로 알고 싶어 집니다. 그날그날 먹고사는 문제에 떠밀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인생에 대해 긴 호흡으로 들여다보고 싶어 집니다.


영화 끝나고 나오는데 밤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싱그러운 20대로 돌아간 듯 내 안의 생동감이 모두 깨어나는 것 같더라고요. 좋은 영화 덕분인가 봅니다. 많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작가의 이전글 아이에게 <채식주의자> 첫 문단을 읽어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