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집에서 연로한 두 분을 대신해 살림을 해주시는 도우미 분이 전화를 했다.
"이번 명절에 아들 며느리도 다 못 온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자꾸만 음식 걱정을 하세요. 따님이 와도 식당에서 사드릴 거니까, 집에서 일절 뭐 준비하실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도 잊어버리고 자꾸 물어보며 걱정하시는데, 어떻게 하죠? 제가 명절 전에 와서 뭐라도 좀 해놔야 하나요?"
엄마는 이제 인지 장애 단계를 지나 치매와 비슷한 상태에 이르셨다. 그래서 손주들 이름도 종종 잊어버리신다. 정정했던 아버지도 작년부터 부쩍 기억력이 떨어지셨고, 얼마 전에 갔을 때는 나를 5초쯤 빤히 보면서 누군가 궁금해하시는 눈치였다.
내가 몇 번 힘줘서, "아버지, 저예요!"라고 말하자 퍼뜩 알아본 듯, "아, 그래그래, 왔구나" 그러셨다.
그러니 명절 음식일랑 아무것도 준비하실 생각 말고 푹 쉬고 계시라고 했다. 도우미 분이 기본적인 찬거리는 늘 만들어 두시고, 명절 특별음식인 전이니 갈비찜이니, 그런 건 내가 싸가면 되니까. 남동생네 가족은 긴 해외여행 탓에 오지 못한다. 그런데도 엄마는 계속 아들과 며느리도 올 거라면서, 명절인데 반찬이 없다고 걱정하시는 듯하다.
차례 음식 준비하느라 명절 때마다 힘들었던 엄마. 매번 되풀이되는 끝없는 여자들의 음식 준비, 대가족 상 차리고 치우기, 손님 대접하기. 그 세월이 참 길었다.
엄마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아버지는 "명절이 1년에 며칠이나 된다고 그러냐"며 조금 타박하듯이 말씀하셨다. 생각해 보면 명절의 처음과 끝은 결국 엄마 담당이었다. 여자들 몫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도와주는 시늉만 하는 남자들이 훈수 둘 동안 발바닥에 땀나게 움직이고 준비하는 건 여자들이었다.
결혼하고 남편의 큰댁에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진짜 드라마처럼, 여자들이 허리 한번 못 펴고 준비한 음식을 갖고, 남자들이 생색내며 제사를 지냈고, 여자들은 작은방에 옹기종기 쪼그리고 앉아 대강 차린 밥상의 찬을 해치우듯이 후다닥 먹어야 했다.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시아버지는 큰아버님이 편찮으시게 되면 그 제사를 우리가 가져와서 지내면 어떠냐고 하셨다. (정확히는 나다. 남편이 음식 준비할 것도 아니니까.) 남편의 사촌형이 결혼을 아직 안 해서 어쩔 수 없다며. 당연히 말도 안 된다며 남편이 거절했지만 그 이야기가 명절 때마다 나와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동물학자인 최재천 교수님이 호주제가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강조하며 사실 유전학적으로는 모계가 훨씬 강력하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편의 조부모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걸까? 나한테 맡겼다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게 두지도 않을 터였다.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제사를 둘러싼 언쟁은 깊게 드리워진 가부장제의 그늘 하에서 아직도 우리가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 사례다.
명절 때마다 항상 쭈그리고 앉아 음식 준비하던 엄마. 이제는 그 고단한 쳇바퀴에서 자유롭게 되신 지가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명절 때면 음식 걱정을 한다. 치매가 걸린 와중에도.
"나중에 나이 들면, 제사에서 해방되어 명절에 해외여행도 실컷 다니고 싶다"고 하셨는데 정작 그때가 오니 몸과 맘은 늙었고, 해방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계신다.
가끔, "어른들이 살면 얼마나 사신다고 그래? 그냥 맞춰드려"라고 하면서, 전해 내려오던 것이니 여자들이 조금만 참으라고 희생을 강요하는 이들이 있다. 어른이건, 젊은 며느리건, 주어진 인생은 유한하다. 네 인생을 좀 헐어서 이렇다 할 전통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인습에 쓰라고,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