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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키나 pickina Jun 23. 2023

미니멀리스트가 되고픈 맥시멀리스트

자취집을 빼고 본가로 다시 이사하면서 느낀 점

스페인 유학이 확정되고 자연스럽게 수많은 변화가 따라왔다.

그중 하나는 지금 독립하여 살 고 있는 자취집을 빼고 본가로 들어가야 할지, 혹은 이 자취집을 유지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따로 또 같이 하는 현재의 라이프스타일이 정말 좋았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전셋집도 너무 좋았다.

한강공원과 가까운 위치 외에도 나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꾸며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여름의 거실
이른 아침 거실 전경
입주 전 직접 그린 가구 배치 구상도


특히 여행지의 감정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이 거실은 나의 최애 공간 중 하나였다.

감정적으로만 생각하면, 스페인에 1년만 다녀오는데, 와서 또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건 일을 하건 할 텐데 그냥 집을 유지해 두고 가고 싶었다.


내가 이런 중차대한 그리고 어려운 결정을 할 때마다 하는 의식이 있다.

각 선택을 내렸을 때 어떤 것이 후회가 덜할까를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Infp 성향이 정말 두드러지는 나는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중요한 선택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꼼꼼하게 각 선택지의 장단점을 비교해 본다.



그래서 결론은, 수많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전셋집을 연장하지 않고 다시 본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처음 자취를 결심했을 때 부모님이 많이 반대하셨지만, (집 근처이기도 하고 돈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결혼 전에 여자 혼자 자취하는 것 등에 대한 반발도 있으셨다. 물론 부모님과 떨어져 살만큼 딸이 많이 커버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어려웠을 수 있다.) 결국 내가 밀어붙일 수 있었던 논리 중 하나는 "일단 2년간 자취 체험해 보는 거야. 돈을 주고 경험을 사는 거지. 엄마도 결혼 전에 혼자 살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 않아?"였다. 그러면서도 한번 집을 나온 이상 다시 들어가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1년 반여만에 다시 본가로 들어갈 줄이야!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이사 준비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이 많은 짐들을 다 어떡하지!


나는 자취를 하면서 최대한 나의 취향을 많이 발견하고, 집에 그것을 발현하려고 노력하였던 것 같다.

밥을 규칙적으로 챙겨 먹거나 하지는 않아도 앉아서 새소리를 들을 나만의 공간은 꼭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쓸모가 있는 생필품보다는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쓸모없을 수 있는) 집의 무드를 채우는 데코 용품 등이 많았다.


본가로 들어가게 되면 지금 투룸+거실+부엌+베란다에 두고 있는 짐들을 방 하나로 압축해야 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주요 고민은 아래와 같았다.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커피머신, 소파 등 필요 없는 것들은 중고시장에 팔아야 하는데 잘 팔릴까?

많이 버려야 하는데 내가 버릴 수 있을까? 다 필요한 건데..

그냥 버리기 아까운 것들은 혹시 버리면서 기부 영수증 등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다행히 첫 번째 고민은 과거 영업직 경험을 살려 당근마켓에서 폭풍 네고 및 영업을 한 덕에 잘 해결되었다. 마침 나와 이사 일정이 같은 당근 큰손 분께서 세탁기, 소파, 냉장고를 일괄로 가져가주시기로 하였고, 그 외 청소기와 전자레인지, 가구집기 등도 하나하나 처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고민이 바로 이 글의 메인 주제이다.

하.. 미니멀리스트는 어떻게 되는 거야 대체


나에게는 집에 있는 사물 하나하나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과거 여행에서 모은 영수증은 추억이었고, 잘 입지 않는 옷이더라도 그 옷을 샀을 때의 추억이 떠오르거나 빈티지 옷이기 때문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강매로 산 크리스마스실은 나중에 비싸게 팔 수도 있기 때문에 버릴 수 없었다.


깨달음을 얻으신 스님은 무소유의 중요성을 설파하시고,

넷플릭스의 정리 프로그램에서는 다 비워내라고 하는데,

나는 왜 그럴 수 없을까!


이번에도 역시나

굳게 마음을 다지고 서랍을 열어도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버릴 수 없지"라며 다시 서랍을 닫아버리는 나를 볼 수 있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너무 갑갑해서 옷장에 있는 대부분의 옷들을 다 당근하고

거의 편집샵이나 쇼룸처럼 옷들을 듬성듬성 걸어놓았는데, 이제는 그게 익숙해져서 더 많은 옷을 옷장에 두지 못하겠다고 했다. 무려 어떤 경지에 이르렀냐면, 옷 하나를 새로 살 때 무조건 다른 하나를 버린다고 한다. One Out One In이란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우리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내 마음에 가득 들어차있는데 어떻게 우선순위를 세워 어떤 것은 남기고 어떤 것은 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냥 나를 강제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웠다.


향후 1년 이내에 다시 입지 / 쓰지 / 보지 않을 것은 버린다.

옷이나 화장품 중에서 나의 퍼스널 컬러와 맞지 않는 것들은 버린다.

본가에 보관하기 어려울 만한 것들은 버린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20L 쓰레기통과 재활용 봉투를 두고 하나하나 비워나갔다. 집 전체를 정리하는데에 1-2주 정도는 걸렸던 것 같다. 하루 만에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물건 하나하나에 애착을 갖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남들은 '이게 무슨 비운 거냐' 하겠지만 많은 것을 비워낸 후 거실의 모습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난 후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다


타고나기를 나는 미니멀리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나와 애착관계에 있는 물건들과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은 변하고, 공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취향을 나의 공간에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물건을 들이기 위해) 서는 기존의 것들을 비워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비워내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해당되는 것들은 가.차.없.이.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가지고 물건을 비워내다 보면 멀쩡한 물건들조차 쓰레기봉투에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

그럴 때 그걸 샀던 과거의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환경에도 좋지 않기 때문에 자꾸만 죄책감이 들었다. 그 물건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당근마켓에 올려서 판매하는 것은 쉽지도 않을뿐더러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찾아낸 방법은 바로 "굿윌스토어 / 아름다운 가게 / 옷캔" 등의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옷을 주로 이 방법으로 나눔 하였고 옷의 양이 꽤 많았기에 택배보다는 자차로 직접 가져다 드릴 수 있는 위치의 굿윌스토어 은평점에 방문하였다.



옷 보따리 네 개를 이고 지고 리셉션에 가서 기부하러 왔다고 하시니 기부영수증 발행을 위해 접수증에 인적사항을 기재하라고 하셨다. 옷을 하나하나 세어보시더니 총 91점이고 금액이 기재된 영수증을 일주일 이내에 카카오톡으로 보내주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받아본 영수증에는 227,500원이라는 금액이 찍혀있었다. 원래 버리려 했던 옷이 굿윌스토어라는 통로로 필요하신 분들께 가게 되고, 나는 기부영수증도 받게 되니 뿌듯했다.




맥시멀리스트로 살게 된 이상,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맥시멀리즘을 추구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어른이 된 이후에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큰 계기가 있지 않는 한 어려운 것 같다.


나와 비슷한 또는 정반대의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분들의 의견도 많이 들어보고 싶다 :)


이사를 준비하며, 우리 집을 마지막으로 밝혀 줄 꽃 한 다발을 사 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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