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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 Jan 05. 2024

숫자에 지배당하는 삶

T가 잠이 든 시간은 모호했다. 그는 2023년 12월 31일 밤 열한 시 십오 분쯤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지만, 여느 때처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뒤척이며 막 잠이 들었을 때쯤 거실에서 가족들이 틀어놓은 티브이에서 들리는 새해 카운트다운 소리가 들렸으니, 그는 2023년과 2024년 중간 어디쯤에서 잠이 든 셈이다. 잠이 드는 순간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2023년에 잠이 든 걸까? 2024년에 잠이 든 걸까?'

그는 스스로 만든 질문에 혼자 답하며 곧 램수면으로 접어들었다.

'아무렴 어떠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어떤 차이가 있다는 거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숫자에 불과한 걸...'


 2024년 오전 10시 21분쯤 눈을 뜬 T의 세상은 역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어제 잠을 청하며 스스로 했던 자문자답이 그의 무의식에 스며들었는지 2024년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새로운 해도, 나이도 심지어 시간까지도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상의 숫자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커져나갔다. 지구위에 그어놓은 가상의 선인 경도와 위도 역시 지배하는 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듯이 말이다.


생각해 보면, 기차가 없던 시절에는 사람들 사이에 분초를 다툴 정도의 다급한 일이란 없었다.

또한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해의 그림자를 보고 약속을 정했을 것이며,

연인들은 깊은 밤 달의 위치와 모양으로 애틋한 밀회를 이어갔을 것이다.


시간을 비롯한 숫자들이 삶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특히 그가 자신이 운영하는 서점을 이사한 이후로 더욱 강해졌다. 새로운 장소로 서점을 옮긴 이후 그는 훨씬 자유로워졌다.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손님도 직원도 더 이상 없었으며, 더 이상 자신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났다.

생각을 바꾸자 이 작은 공간은 오롯이 그가 만든 시간만이 존재하는 우주가 되었다.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자 그는 자신의 몸이 중력을 이긴 듯 가벼워짐을 느꼈다. (실제로는 이사를 하면서 살이 제법 빠져있었다.)

돈, 평수, 나이, 재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숫자들이 그를 평가하고 단죄하고 있었던가. 만약 누군가 그에게 나이를 묻는 다면,

"나는 그런 것은 모릅니다."라고 말할 참이었다. (실제로는 아무도 그의 나이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숫자에 얽매여 사는 삶의 한계를 뛰어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의 서점을 더욱더 실험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는 낮에는 문을 닫고 밤에만 문을 여는 서점으로 바꾸겠노라고 발표했다. 예상대로 가족들은 반대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밤에 서점을 찾겠냐며 가족들이 반문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어차피 낮에 책을 사러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니 큰 손해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밤에만 문을 여는 지구불시착은 며칠간 손님이 없었다. 그러다 며칠 뒤 가끔 취객 몇 명이 술김에 술을 파는 곳이냐며 들렸다. 그는 술대신 책을 파는 곳이라 말했다. T는  술에 취한 그들의 이야기를 정성스레 들어주었고, 그들은 취기에 책을 한두 권씩 사갔다. 어차피 안주 하나 두 개 값에 불과한 게 책 값이니 그들은 안주를 고르듯 책을 골랐고 후하게 값을 치르고 갔다. 택수는 그들이 필요한 건 어쩌면 술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인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몇 달 뒤 SNS를 타고 밤에만 문을 여는 서점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의 서점은 순식간에 몇 만 팔로우를 이끄는 유명서점이 되었다. 불면증이 있는 이들이 모여들거나 인플루언서들이 인터뷰를 하러 오기도 하고 티브이에서 그의 삶을 조명하는 다큐가 방영되기도 했다.


 그렇게 정확히 딱 1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대형 S커피브랜드가 있던 자리로 서점을 옮길 수 있었다. 건물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서점을 찾으면 건물의 가치가 2배나 3배로 뛸 것이라고 생각하며 비교적 저렴한 값에 그에게 입점을 권했다. 밤에만 문을 여는 택수의 서점은 더욱더 유명세를 탔고,  그의 하루 스케줄은 이제 빼곡히 채워졌다.

이제 그는 매일매일  책이 팔린 개수를 정확히 세야 했고, 낮동안은 잠을 자지 못하고 부족한 책의 수를 정확히 예측해 입출고를 맞췄다. 밤새 함께 일하던 직원의 실수로 출고일을 맞추지 못하거나 회계에서 오차가 발행하면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절대 실수하면 안 되니 정확히 숫자를 계산하라고 다그쳤다.

 건물주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서점의 인기는 일 년 만에 다시 사그라들었고, T는 약속한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해졌다.  

그는 다시 매출을 계산하고 월세를 낼 날짜를 두려워하며 체크했다. 전화기에 건물주의 전화번호가 찍히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숫자들이 다시 그의 주변을 맴돌며 다가왔다.

숫자들은 그를 평가했고 다시 그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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