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07일, 오늘의 그림 한 장
엄마는 분홍색 플라스틱 바가지를 좋아했다.
그래서 엄마의 손에는 늘 분홍 바가지가 들려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나에겐 분홍 바가지는 너무나 익숙한 존재다.
엄마는 분홍 바가지를 만능 바가지라고 불렀다.
만능 바가지에는 늘 무언가가 넘치도록 가득 담겨있었다.
쌀을 가득 담아 씻기도 하고
장독대에서 갓 꺼낸 김장김치를 가득 담아두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겨울엔 가족들이 먹을 귤을 한 가득 담아 거실 한가운데 두었고
가족들이 지나다니다 한 두 개씩 꺼내어 먹었다.
시간이 흘러 분홍 바가지가 휑해지면
직접 농사를 지어 튀긴 강냉이를 넘치게 담아두기도 했다.
분홍 바가지는 한시도 비어질 틈이 없었다.
무언가를 담아내기에 바빴던 분홍 바가지.
늘 무언가로 꽉 찬 분홍 바가지를 보며
어린 나는 생각했었다.
왜 저렇게 분홍 바가지만 괴롭히는 건가 싶어
엄마가 한 눈을 판 사이에 분홍 바가지를 가져와
이불속에 감춰둔 적도 있었다.
요즘 주위 사람의 말을 계속 주어 담고 있는 나를 보며
구멍 하나 없이 꽉 막힌 분홍 바가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가볍게 던진 말을 마음속에 켜켜이 담아두고
무분별하게 담긴 말은 점점 나를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요구하는 대로 잘 해내는 사람,
주위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말이다.
주워 담은 말대로 살아가기 바빴다.
나는 나 답게 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만능 분홍 바가지처럼 모든 걸 담아내며 살아가기보다
구멍이 송송 뚫린 소쿠리처럼 상대의 말을 걸러 듣기도
비워내기도 하는 가벼운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