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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네 May 13. 2022

하버드 토론 수업에서 살아남기

나도 뭐라도 말할 수 있었으면

미국 대학원생 2년 차 시절. 한국에서 나고자란 탓에 성인이 되고 나서야 영어로 제대로 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영어를 사용하거나 배운것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영어권에 거주했던 기간은 총 10개월이 전부였다. 


하필 전공은 국제관계학 (혹은 정치학). 미국에서 이쪽을 공부한다는 것은 평소에도 말 좀 하고 글 좀 쓴다 하는 원어민들과 토론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 있다 보니 토론 수업이라면 할 말이 많다. 물론 수강 신청할 때 토론 점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수업은 애초에 피한다. 하지만 피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는 법.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하는 토론 수업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그 고민은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을 때 정점을 찍게 되었다. (비록 하버드 학생은 아니지만 본교 교차수강 정책 덕에 하버드에서 수업을 몇 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결코 토론을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살아남기 위해 고민하고 깨달았던 내용들을 정리해보았다.


유형별 토론수업


1. 전체 토론

교수님은 질문하고 학생들은 주로 대답한다. 학생들이 또 다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학생의 선행 대답에 주거니 받거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토론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체 맥락을 따라가는 것이 핵심이다. 맥락 잡기가 어렵다면 초반에 대답하는 것이 유리하다. 


2. 조별 토론

같은 학생들끼리 주어진 질문에 대해 일정 시간 동안 의논한다. 그리고 전체 학생들이 다시 모여 각 조에서 무엇을 토론했는지 이야기해보기도 한다. 다시 모일 필요가 없는 조별 토론은 아주 수월하다. 친구들끼리 대충 이야기하고 끝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전체 토론으로 모여서 교수님이 지목해서 물어보시기까지 한다면, 조별 토론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잘 요약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3. Cold Call

토론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교수님이 랜덤으로 학생을 지목해서 질문하는 방식이다. 전체 토론과 유사하게 진행되나 학생들의 자발성 여부에 큰 차이가 있다. 전형적인 미국 로스쿨 수업방식이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토론 수업이다. 팁 하나는, 교수님의 콜을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손들고 자발적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4. 온라인 토론

앞서 말한 이 모든 형태의 토론을 온라인으로도 할 수 있다. 경험상 온라인으로 토론이 진행된다면 조별 토론(Group Discussion)을 꼭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이 온라인이라고 딴짓하지 않고 수업에 더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는 토론 수업을 온라인으로 먼저 경험했다. 1년을 그렇게 참여하다가 막상 현장 수업에 가서 토론을 하려니 너무너무 어려웠다. 온라인으로는 청중을 안 보이게 하거나 작게 띄워둘 수 있는데 현장 수업에서는 청중이 너무 잘 보였다. 그리고 손을 드는 것도 어려웠다. 목소리도 훨씬 커야 했다. 줌으로는 그냥 손을 드는 아이콘을 클릭해두면 내 차례가 되어 말하기까지 일사천리인데, 현장에서는 교수님이 내 손을 못 보는 경우도 있었다. 현장 분위기라는 것이 더 잘 느껴져서, 손을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훨씬 눈치를 보게 되기도 한다. 

fauxels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1. 원어민이라도 수업 참여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번 학기 특히 수업 중 학생들을 관찰해본 결과, 모든 영어 원어민들이 다 수업에 잘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 친구는 영어도 잘하는데 왜 말을 안 하지?" 싶은 궁금증으로 관찰을 해보았다. 대중 앞에서 말하기를 굉장히 꺼려하거나, 수줍음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또는 수업 준비가 덜 되었거나, 수업 내용 자체가 본인에게 어려워서 참여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혹은 수업 내용은 이해가 되지만 딱히 '내 의견'이 없어서 못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수업에 참여하는 게 어려운 것이 반드시 영어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더 유리한 조건에서도 어려워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 사실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래..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어. 원래 어려운 거였어.' 


2. 아는 만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 학기 아주 크게 깨달은 사실이다. 다른 친구들뿐 아니라 나조차도 어떤 수업은 참여하기가 수월하고 어떤 수업은 참여하기가 너무 어려운 적이 있었다. 여러 변수가 있겠지만, 더 어려웠던 수업을 살펴보면 머리를 아무리 쥐어 짜내도 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수업 전에 리딩을 열심히 해 가도, 애초에 그 분야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적어서 말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는 것이 적으니 질문할 것도 없었다. 실제로, 수업 중 다른 친구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자신이 잘 아는 분야가 다뤄졌을 때 열심히 손들다가,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잘 참여하지 않은 모습을 본다. 정말이지 뭐라도 아는 것이 있어야, 뭐라도 엮어서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수업 들어가기 전에 입은 풀고 가자.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집에서 영어로 말을 좀 해보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집에서는 계속 한국어를 쓰다가 수업 때 입을 전혀 안 풀고 건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갑자기 영어를 해야 할 경우 친구들과의 간단한 대화조차도 어버버 하기도 했다. 반면, 집에서 영어로 아무 문장이라도 소리 내서 읽은 후에 학교에 갔던 날은 훨씬 영어가 매끄럽게 나왔다. 수업 전 미리 토론 내용을 준비해둔 것이 있다면, 그 문장을 여러 차례 말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4. 무엇을 토론하게 될지 예측해보자.

'수업시간에 무슨 내용으로 토론하게 될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어떤 교수님들은 '이런 내용으로 토론할 거야'라고 미리 '생각해볼거리' 리스트를 주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자료를 읽어갈 때도 훨씬 수월하고, 질문에 대한 답도 미리 적어두면 되니 수업 참여 시 별로 걱정이 없다. 하지만 아무런 틀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 무슨 내용을 수업 때 이야기하게 될 것인가 미리 예측해서 답을 준비해 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예측해야 할 것인가?


읽기 자료로 주어진 저자들의 핵심 주장, 그에 대한 내 의견(비판이나 반론), 저자가 사용한 데이터나 방법론, 방법론의 한계, 논문에서 정의한 핵심 용어(키워드), 이 연구가 주는 정책적 함의, (필자가 들었던 수업은 꼭 policy implication에 대한 질문이 꼭 주어졌다.) 이 외에도 이전 수업 내용과의 연결점, 최근 뉴스와의 연결점, 그리고 앞의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생각 + 동의하거나 반대한다면 그 이유까지 생각해두면 좋다. 이외에 그냥 질문 자체를 준비해 가도 좋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읽기 자료를 정리해두며 읽어도 도움이 된다. 교수님이 ***라는 용어가 무슨 뜻이었는지, 혹은 그 논문의 핵심을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실 때 준비해둔 메모가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수업 참여도를 높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렇듯 학기 초반에 수업 때 교수님이 토론을 이끌어가는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면, 학기 후반에는 좀 더 수월하게 토론을 준비해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패턴을 예측하기 어려운 수업도 많다. 어떤 수업은 내가 준비해 간 것은 토론하지 않고 늘 새로운 유형의 질문으로 토론하는 수업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교수님을 찾아가서 상담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토론 참여하기 어려워서 고민이다, 어떤 식으로 수업을 준비해 가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5. 이왕이면 앞자리에 앉기

뒷자리에 앉으면 발표의 cost가 그만큼 커진다. 앞자리에 앉으면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교수님이 다 알아들으신다. 부끄러워도 교수님과 1대 1로 교감한다는 느낌이 들고, 청중은 잘 안 보여서 덜 부끄럽다. 내 말을 전 인원이 다 못 알아들어도 된다. 그럴 경우 교수님께서 내 질문을 rephrase 해주시기도 한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으면 내 목소리가 교수님에게까지 도달하기 위해, 더 크게 말해야 한다. 교수님께 내 말이 도달하려면 수업 인원 전체에게 들릴만한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이 훤히 보이니 훨씬 더 부담이 크다. 


경험상 뒷자리에 가장자리는 더 최악이었다. 가장자리가 특히 교수님의 시야에 잘 안 들어오는데 뒷자리면 교수님이 더 놓치실 수도 있다. 기껏 용기 내서 손들었는데 교수님이 못 보고 앞에 앉은 학생들만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앞자리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준비해둔 말, 혹시라도 찾아볼 사전이라던지, 노트북 화면이나 필기해둔 것이 뒷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한다. 장단점이 있으나, 목소리가 작고 수줍음이 많다면 너무 뒷자리는 피하는 것이 좋다.


6. 다른 학생들/교수님과 친해지기

익숙한 환경보다 낯선 환경에서 말을 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손들고 발표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같은 수업 학생들이 좀 익숙해지고, 친해지기까지 한다면, 비교적 편안한 환경에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다. 사람들이 내 서툰 영어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수님과 친구들이 조금 더 편해지면 서툴더라도 심리적으로 말을 하기가 수월해진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옆 자리 사람들과 인사하고, 교수님 오피스 아워에 찾아가서 좀 더 친해지면 좋다.


7. 이미지 트레이닝

어떤 수업은 유독 토론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적이 있다. 참여를 못하다 보니 점점 더 발표하기가 두려워졌다. 그 수업은 들어가기 전부터 속이 약간 울렁거리고, 막상 손을 들려고 하면 내 심장 소리가 귀에 들려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던 수업이었다. 불안감을 낮추기 위해 영양제를 복용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보다 더 좋았던 것은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체육인, 예술인들이 경기나 무대에서 최대 능력치를 발휘하기 위해 경기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디테일하게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나도 대체 발표가 뭐라고), 내가 손을 들고 성공적으로 말하는 일체의 과정을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서도 내가 손을 들고 말하는 상상을 계속했다. 불안감이 너무 심하다면 이미지 트레이닝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종강일날 급하게 찍은 케네디스쿨 강의실. 벌벌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토론 수업에 임하는 마음가짐

영어로 토론 수업에 참여하기까지 필요했던 마음가짐을 정리해보았다.


1. 모르면 모른다고 할 거예요.

Cold call을 앞두고 멘탈을 잡을 때 도움이 되는 마음가짐이다. '나 열심히 준비했어. 그런데 모르는 게 있어.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할 거야.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드러났을 때, 내 부족함을 인정할 거야. 나는 여기 배우러 왔지 완벽하게 다 알아서 온 게 아니야. 틀리면서 배우는 거야. 모르는 것을 들키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말자.' (실제로 탑스쿨 대학원생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교수님 질문에 모르면 모른다고 하거나, 잘못 이해했다고 쿨하게 인정했다.)


2. 서툴러도 대충 알아들어주세요.

'나는 최선을 다해 말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영어가 좀 서투르다. 그러니 원어민인 당신이 찰떡같이 알아들어달라'하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호의적인 경우에, 정말이지 내가 어버버 이상하게 말해도 상대방이 찰떡같이 알아들어 줄 때가 있다. 우리도 외국인이 우리말을 이상하게 해도 최선을 다해 알아들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3. 그건 당신의 마음이에요.

그런데 모두가 서툰 영어에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비웃는다거나, 살짝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는데, 그 감정을 다루는 방법은 '그래 그러라고 하여라..'였다. 특히 줌으로 토론을 할 경우, 반 친구들의 미세한 표정을 어쩔 수 없이 포착해버린 경우가 있었다. 내가 말할 때, 엇 쟤가 좀 B 웃네? 하고 상대방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그냥 '그래.. 너의 마음은 너의 것이지. 어쩔 거야. 조금 창피했지만 난 할 말 했으니 됐어.' 라며, 그 반응의 주인은 그 사람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되었다.


4. 창피한 것보다 도전하지 않은 것이 더 속상할 일인걸

창피를 모면하는 것보다 내 완벽주의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더군다나 창피를 모면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수업 참여를 해서 점수를 얻는 기쁨이 개인적으로 더 컸다. 수업 때 나 빼고 다 한 번씩 말을 했는데 나 혼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때 자괴감이 정말 컸다. 엉뚱한 말을 해서 창피한 것보다 그 고통이 더 컸다. 그래서 '그래, 수업 끝나고 그렇게 괴로워할 거면, 그냥 철판 깔고 손 들자. 그리고 마음 편안한 저녁을 보내자.'라는 마음으로 그냥 손을 들어버렸다. 


5. 친구들도 나를 통해 배울 권리가 있어

한 번은 국제법 수업이었는데,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학생들이 준비를 잘 못해오거나 조별 토론에서조차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던 적이 있었다. 수업 마지막에 다소 화가 나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너의 발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친구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너의 반 친구는 너와 생각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배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토론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라고 하셨다.


사실 '티칭에 대한 책임은 교수님한테 있는 것 아닌가?' 싶다가도 토론과 글쓰기를 통해 생각이 develop 되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대학원, 특히 문과 수업에서는 동급생과 생각을 나누며 배우는 것은 학습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점수에 들어가지 않고 의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토론에 참여함으로써 수업의 풍성함에 기여하는 것까지가 학생의 의무라는 것은 다소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여기까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토론 수업에 참여했던 경험을 나눠보았다. 하버드에서도, 모교에서도 토론은 매우 힘든 순간이었지만, 여차 저차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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