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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네 Sep 18. 2021

다시 무대가 그리워져서

동경하기도 했고 도망치기도 했고

무대가 그리워서

늘 무대를 동경했다. 어릴 때야 교회며 학교며 동아리며 사람들 앞에 설 일이 많았다. 연극, 바이올린, 노래, 춤 등 장르를 불문하고 어른들이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섰다. 고등학생 때까지 그랬다. 20대 후반 즈음되고 나니, 직장에서야 직무상 관련이 있지 않고서야, 사람들 앞에 설 일이 없었다. 사회초년생일 시절에는 모니터 들여다보고 있기 바빠 어디 사람들 앞에 나설 일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요즘, 수업 중에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될 때 그곳이 유일하게 나의 무대 욕구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곳이 되어버렸다.


무대에 서있는 가수나 배우들을 보면 왠지 부러웠다. 그곳에 설만한 실력과 기회가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무대 뒤에서 얼마나 연습했을까,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다가도 사람들과 자신의 생각과 창작물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무대 욕구가 다시 불일 듯 일어날까 봐 음악도 자주 듣지 않았다. 공연도 자주 보러 가지 않았다. 그렇게 원했으면 한 번쯤 다시 시도해봐도 됐는데 돌이켜보니 왜 이렇게 극기 훈련하듯 살았을까 싶었다. 공부하느라 바빴고, 그래서 꽤 괜찮은 이력서 몇 줄과 성적을 얻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나 정도는 해봐도 괜찮았을 것 같다.


freepick


공부가 힘들어서

오래전에 무대 뒤의 고생이 너무 힘겨워서 공연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았던 때가 있었다. 책상 앞에서 하는 공부만 원 없이 할 거라고 다짐했다. 아무도 내 공부를 방해하지 말았으면 했다. 20대 내내 나의 최대 목표는 미국 유학이었고 석사에 이어 박사까지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학원에 와서 알게 되었다. 나는 그냥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곳에 '내가 원하던 딱 맞는 것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값비싼 비용을 치르고 알게 되었을 때 밀려오는 혼란스러움이란 정말 표현하기 어려웠다. 무슨 일을 하든 나와 딱 맞지 않는 것을 하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라고 스스로를 달래 봐도 달래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공부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좋아하면 멋져 보이는 것이었을까. 전공 이름이 멋져 보여서 속았던 걸까. 이 분야에서 나는 꽤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한 학문의 세계는 훨씬 더 고단했다. 20대 설정해왔던 모든 기대와 방향이 뿌리째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이 길이 아닌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냥 지금 하는 공부가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30대가 되어 다시 나의 고민은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선택

그렇다고 무작정 내 분야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하던 공부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일단 진학해버린 대학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년을 온라인으로 한국에 살며 미국 학교 수업을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미국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지나면 곧 출국을 해야 했다. 혼자서 떠나는 것이 아니기에, 이제 한국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예정이었다. 그래서 방학동안 이제 더 배우기 어려울 것 같은 '한국어로 하는 연기'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온 갖가지 적성검사만 하면 나에게 그렇게 배우라는 직업을 추천해주던 검사들이 과연 신빙성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거든, 그냥 가볍게 시작해보라는 조언이 반가웠다. 그래서 가볍게 시작해보기로 했다. 의외의 자질을 발견하면 땡큐, 아님 말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지만 시작하기에 기회비용이 크다면 가볍게 일단 시작해보고 추후에 기회를 노려보라는 조언이 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어쨌든 말은 가볍게 시작한다고 했지만 내 마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너무 무겁고 중대한 결정이었다. '학비도 내는데 취미까지 배운다고? 시간 나면 돈이라도 한 푼 더 벌어야 하는 거 아니야? 시간이 있으면 논문이라도 한 줄 더 써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진로 탐색은 대학생 때 끝내야 했던 거 아니야?' 이런 의심이 자꾸만 나를 괴롭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시작하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죄책감이 따라왔던 걸까. 나의 결정이 배부른 취미 활동하는 것 정도로 여겨질까 봐 두려웠다. 헬스장이나 영어 학원이야 아주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비싼 비용도 지불했지만 연기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이 너무 빨라서, 발음과 발성을 교정하고 싶다는 부차적인 이유를 굳이 만들어 대답했다. 하지만 내 진심은 너무 배우고 싶어서였다. 배워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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