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시 경기도에 살고 있었고 다니고 싶은 학원은 서울에 있었다. 근처 살 때 다녀볼걸, 잠깐 후회했지만 그때라도 다니기로 했으니 괜찮았다. 미국에 온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배우지 않았더라면, 한국에 있을 때 다녀볼걸 하고 후회는 더 커졌을 것이다.
학원을 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다. 개인적으로 큰 입시 학원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직장인 취미반이어도 좋으니 선생님도 학생들도 연기에 진심이길 바랐다. (취미여도 진심일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할 만큼 소규모이길 바랐다.
영어학원이나 헬스장은 그렇게도 잘 등록했으면서 연기 학원에 연락 한번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망설임이 있었는지 모른다. 결국 도저히 전화할 용기가 안나 카톡 상담을 했다. 참관수업을 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거기까지 하니까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어떻게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기까지,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 나를 마주하기까지 말이다. 예전에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 기회를 그냥 잡았으면 되었는데 말이다. 이제라도 배워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훗날 이렇다 할 대배우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만한 기회가 없더라도 일단 내가 지금 행복하면 됐다. 이왕 배운 것 앞으로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일단은 이렇게 시작한 거면 됐다.
첫 참관 수업일이었다. 본격적인 등록은 참관수업 후에 하기로 했다. 수업은 주차별로 리딩, 동선, 촬영, 이렇게 돌아가면서 진행되었다. 수업 진행 상황에 따라 주차별 진도는 조정되기도 했다. 내가 방문했던 날은 (하필) 촬영하는 날이었다. 3명 남짓한 인원이 4분 정도의 짤막한 신을 연습했다. 물론 나는 참관인이니 촬영 시작과 함께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같은 곳에 앉아서 같은 장면을 20번 넘게 관찰했을 뿐이었다. 눈에 띄게 잘하는 분도 보였고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분도 보였다. 연기를 하는 건 어려워도 보는 건 쉽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딱 봐도 누가 연기를 잘하고 있는지는 눈에 바로 들어왔다.
연극이나 뮤지컬 연기도 물론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매체 연기가 나는 더 흥미로워 보였다. 내용은 상당히 극적일지라도 연기하는 방식은 과장되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가끔 매체에서도 너무 과장되게 표현된 장면을 보면 좀 불편하기도 했다. '저 상황이 저렇게 언성을 높일 일인가? 너무 과하게 다투는 것 아닌가?' 싶을 때도 사실 있었다. 아직 연기를 잘 알지 못하는 연알못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연기에 더 많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았다.
공부든 뭐든 조기교육이 중요한 우리나라에서 연기도 일찍 시작해야 성공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나는 내가 가진 조건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생 연기를 해온 사람이 아니지만 30년 동안 가져왔던 다채로운 감정과 경험들이 다 재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뚫어져라 분석했던 인물들과 작품들, 취업에 별 도움 안된다고들 하지만 부전공으로 선택했던 영문학 수업들, 수도 없이 써댔던 에세이들, 여러 직장에서 경험했던 그 모든 것들이 자산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첫날 참관했던 반이 마음에 들었다. 다들 잘해서 부담스러웠지만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기해야 내 연기도 늘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완전 기초부터 배우는 상황이니 초보자들과 배워야 부담이 적겠지만, 그래도 욕심이 났다. 우등생이 반에 있으면 같이 잘하게 될 것 같았다. 특히 연기처럼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분야는 왠지 더 그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