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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네 Dec 15. 2021

첫 번째 수업 - 리딩

내 말이 이렇게 빨랐다니

덤덤하게

첫 수업 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수업시간보다 한참 일찍 학원 근처에 도착했다. 약속 마치고 어디 가냐는 친구에게 나는 아주 수줍어하며 오늘부터 연기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했는데 친구는 오히려 덤덤했다. 잘했다고, 재밌을 것 같다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건 좋은 일이라고 했다. 내 호들갑이 머쓱할 정도로 덤덤하게 반응해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자기도 배워보고 싶은 것이 있다며 이야기해주었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원래의 본업과 다른, '나만의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생각해보니 원래 내 분야가 아닌 일에 도전한다는 것이 그렇게 수줍을 일일까 싶었다. 



나 홀로 연습

참관 수업 때는 정말 참관만 하고 대사 한번 읊어보지 못했다. 이미 촬영을 할 만큼 준비해온 수강생들 틈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가만히 있었던 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그날 다음 수업 때 리딩 해볼 대본을 미리 받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소리 내서 읽고 또 읽어보았다. 


어느 유튜브 영상에서 연기 연습 방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실제 작품에서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했는지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분석대로 연습을 해보고 영상을 확인해 보라는 것이었다. 몇 번 나 홀로 연습했다. 그런데 도무지 앞뒤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결국 원작의 배우들이 연기한 장면을 찾아보았다. 그 연기를 똑같이 모방하기만 하면 내가 분석한 것은 힘을 잃을까 조심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이해한 것과 좀 달랐다. 원작 배우들의 연기가 훨씬 설득력 있어 보였다.



첫 대사

어쨌든 모방에 내가 상상하고 분석한 것을 더해서 준비해 갔다. 짤막한 2인 대사였는데 두 캐릭터 모두 준비해 가야 했다. 7시 반이 되자 수업이 시작되었다. 시작하자마자 그냥 바로 리딩을 시작했다. 기본 개념이라도 알고 시작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미 배우던 사람들 틈에 뛰어들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다짜고짜 첫 대사를 시작했다. 정말 다짜고짜였지만 그토록 오래 기다리던 첫 대사를 빨리 뱉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중간중간 부족한 부분에 대한 설명과 알아두어야 할 기본적인 원칙을 알려주셨다. 시행착오와 피드백을 반복하면서, 그렇게 배우는 것이 연기인 건가 싶었다.



Lesson 1. 현실이라면?

나는 주인공 대사를 상당히 깐깐하고 까칠한 버전으로 준비해 갔다. 그렇게 몇 번 다른 수강생들과 돌아가면서 주고받았다. 그런데 선생님의 요구는 달랐다. 주인공이 조금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준비해 간 것과 현장의 디렉션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일까. 


선생님의 설명은 이랬다. 현실의 자신이라면 이렇게 쌀쌀맞게 말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아주 평범한 상황에서, 이미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그 사람이 잘못했어도 처음부터 이렇게 세게 말할 수 있을까. 진짜 나라면 아니었을 것 같다. 적어도 장면 초반엔 일단 친절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내 생각엔 이 인물의 초반 태도에 친절함을 약 40% 정도 더 첨가하면 좋을 것 같았다. 100%의 까칠함보다는 여기에 약간의 친절함을 첨가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감정 표현이었다. 오... 역시 어렵구나! 하지만 역시 재밌었다.



Lesson 2. 말이 너무 빨라

나는 평소에도 말이 매우 빠르다.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더 빨라진다. 가족들 모두 말이 빨라서, 집에 있을 때는 말이 빠른 줄 서로 못 느낀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앞에서 발표할 때, 말이 정말 빠르다는 피드백을 받는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로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말해야 서투른 영어가 들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사를 읊을 때, 특히 화난 부분을 연기할 때 내 말이 엄청 빨라졌다. 역시나 선생님께 가장 먼저 지적을 받은 부분이었다. 이참에 말 속도를 늦추는 연습을 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Lesson 3. 상대방의 반응을 확인하자

매우 빠른 말 속도와 함께 반응 속도가 너무 빠른 것도 문제였다. 문제는 내가 말할 타이밍만 신경 쓰다가 상대방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반응도 없이 내 대사를 해버리는 것이었다. '이 상황을 나는 미리 알고 있고,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티가 나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대사를 하라고 하셨다.


대본 내용이 좀 익숙해진 후,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연기를 해보았다. 마스크를 써서 눈 밖에 안보였지만 확실히 달랐다. 감정 공유가 훨씬 더 원활하게 일어났다고 해야 할까. 상호작용 혹은 교감이 일어난다고 해야 할까. 상대방에게 집중하니 내 연기도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상대방이 좋은 연기를 해주면 거기에 맞춰서 나도 덩달아 잘하게 되었다. 배우들이 가끔 인터뷰에서 '상대 선배 배우가 정말 잘 이끌어 주셨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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