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암기와 집중력
한때는 내가 완벽주의자인줄 몰랐던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 알고보니 나는 스스로에게 기준이 꽤 높은 사람이었다. 높은 기준은 불안감을 만들어냈고, 그 불안감은 살면서 꽤나 많은 성취를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창작하는 사람은 기준이 높아야지. 그래야 좋은 글이든, 작품이든, 음식이든, 연기든, 음악이든 만들어내는 것 아니겠어?'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당사자는 너무 피곤하다.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습관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외우기 강박이 있다. 완벽하게 외워서 말하고 싶다고 해야할까, 청산유수처럼 말할 수 있을때까지 외운다고 해야할까. 병명으로 부를만큼 그렇게 심한 강박은 아니지만, 발표하거나 외국어를 배울때 적지않은 불안감을 만들어 낸다.
예를들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아주 디테일한 대본을 만든다. 대본을 보지 않게 될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만든다. 이미 써놓은 대본이 너무 완벽하게 마음이 들어서다. 그대로 말하지 못하면 아쉬울 것 같아 그것을 달달 외우곤 한다. 외국어를 배울때도 마찬가지다. 영어로 이야기할때도 틀리지 않고 싶다. 틀리지 않겠다는 나의 의도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영어표현을 만들어내는지 알지만, 그래도 틀린 말을 내뱉고 있는 기분이 들때 약간의 자괴감은 든다. 민감한 주제를 이야기 할때는, 초조함에 숨을 쉬지 않을때도 있다. 숨이차서 들숨에 말을 하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말하는 속도가 빠른 것도 어쩌면 이러한 초조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외우기 강박이 연기를 배우면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대본에 있는 것들을 한글자도 틀리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 외우고 싶었다.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그래야 하는 경우도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강박적으로 외우기보다는 맥락에 맞도록 편하게 외우라고 하셨다. 외우는 것을 편하게 하라니. 암기와 편함은 그 존재 자체로 모순된 것들이 아닌가. 방금 외운 것이 어디 깊은 뇌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한 뇌는 그것을 다시 꺼내기 위해 아주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불편한 상태로 입밖에 나오는 것이다.
사실 선생님의 의도는 완벽하게 말하려고 하지 말고 맥락에 맞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토시 하나도 틀리지 않길 바라는 감독님이 와서 지켜보고 있는것이 아니니 말이다. 완벽한 말을 하는 것 대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을 더 배워야 하는 단계였다. 완벽하게 잘 말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은 뒤에야 자연스러움이 한결 묻어났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주고받는 대사의 순서가 꽤 헷갈렸다. 덕분에 역시나 문장 자체보다 '흐름'을 외워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방의 대사에 동문서답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서 서둘러 펜으로 문단을 나눠보았다. 감정이 고조되는 단계에 따라 혹은 주인공이 움직이는 동선에 따라 4개의 대화로 나눠보았다. 문단을 나누니 좀 더 잘 외워졌다.
학원에서 이 장면을 촬영했을때 상대방이 대사를 조금 틀릴 때가 있었다. 상대방이 뱉은 말이 내가 외운 그 문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갑자기 상대방이 다음번에 나와야 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럴때 당황하면 내 대사까지 잊어버리기 쉽다. 실제 촬영 현장이라면 당장 NG겠지만, 이것이 만약 연극이나 라이브 공연이라면 더 큰일이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나까지 '말리면' 안되는 것이다. 위기 상황에도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지나가려면 문장과 함께 흐름을 외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결국 계속 반복하다 보니 다행히 대사는 입에 붙었다. 그런데 여러번 반복하다보니 어느순간 처음처럼 집중하지 않아도, 감정을 넣지 않아도 그냥 입에서 대사가 나와버렸다. 대사를 덜 외웠을때는 대사에 대단히 집중해야 말이 나왔는데 이제는 집중하지 않아도 대사가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다. 자동버튼처럼 튀어나오는 대사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 상황을 충분히 느끼지 않고 감정없이 서둘러 말해버리기 때문이다. 대사가 다 외워지면 오히려 편하고 자유롭게 연기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주 여러번 반복하다보니 그 짧은 장면을 연기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져버렸다. 암기와 집중력은 다른 문제였다.
결국 마지막 촬영때 어떤 대사를 매우 부자연스럽게 뱉어버렸다. 기계적으로, 마치 내가 이 말을 할 순서가 되어서 한다는 듯이 말이다. 대사를 다 외웠다고 집중력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을 끝까지 끌고가려면 계속 집중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