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6개월정도 되지 않았을까. 비혼주의를 부르짖던 내가 결혼이란 것을 준비한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사이 코로나가 창궐했고 주가가 요동쳤으며 부동산 정책이 연이어 발표됐다. 세계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겪고 있고 더 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세계의 변화와는 별개로 나 또한 많은 변화를 겪고 있고 더 이상 결혼 준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 중 물질(에 대한 생각)에 대한 변화를 살펴보겠다.
주가가 요동쳤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요란하게. 코로나가 쏘아 올린 주가 급락은 (구)개미들에게는 끔찍한 좌절을 (신)개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선사했다. 주식이 밥인 우리 엄마조차도 주식을 이야기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재난지원금의 살포, 예적금의 낮은 금리, 일확천금의 꿈이 혼란하게 뒤섞여 시중의 자금이 홍수처럼 불어나 여기저기로 흘러갔다. 때마침 샤넬은 가격 인상을 공표했고 사람들은 비싼 명품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불나방처럼 샤넬 매장으로 달려갔는데 이름하여 샤넬런이다. 당시 기사를 보고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으나 이게 웬일인가, 내가 디올 매장으로 달려가고 있는게 아닌가. 내 사전에 패배란 있어도 명품백은 없었다, 적어도 프로포즈란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프로포즈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이에게 평생을 함께 하자고 구애하는 것이자, 성공적인 구애를 보조할 무언가를 구매하는 것이다. 구애와 구매의 상관관계만큼이나 나와 명품은 전혀 상관이 없는 반면, 아름다움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여자친구는 명품에 관해서는 빠꼼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무패, 내가 하는 것마다 백전무패! 프로포즈에서 패배하는 순간 내 인생은 나락으로 빠질게 분명하기에 일종의 편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예식일 5개월 전까지는 식장 취소가 무료이긴 하지만. 이러한 연유로 자린고비의 아이콘인 내가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디올백을 구매했다.
괄육취골.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다. 물질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일시적으로 버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취한다. 특히나 여자들 세계에서 프로포즈 에피소드와 그에 수반되는 선물은 평생 회자되고 비교된다고 하지 않는가. 잘한 일이다, 잘한 일이다. 텅 빈 지갑 속을 바라보며 속으로 수도 없이 외쳐본다. 서로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내려놓을 줄도 아는 것이야말로 결혼의 기술이지 않을까? 정신승리라 불러도 좋다. 그녀만 곁에 있다면.
(좌) 디올 몽테인 오블리크 (우) 디올 새들백 데님블루
디올백을 구매한 다음날, 디올은 가격 인상을 공표했다. 가격 인상분만큼 돈을 번 것 같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뼈를 내어주고 살을 취한 느낌이긴 하지만. 괄골취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