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인지 감수성 VS 다양성 포용 인지 감수성
내 원적지는 서울시 중구 광희동 105번지이다. 김중업건축가가 1967년에 지어 근대등록문화재로 예고된 서산부인과 맞은편에 위치한 광희문(수구문)자리였다. 지금은 광희문(수구문)에 이어지는 녹지가 되어있지만, 내가 살던 60년대에는 광희문(수구문) 터 곁으로 가게가 서 너 개쯤 붙어있고 안채가 따로 있어 할머니와 삼촌, 고모까지 대식구가 살았다. 세 들어 살던 식구들까지 꼽으면 세 가구가 한 집에서 산 셈이다.
김일 선수 레슬링이 있다든가, 드라마 아씨를 방송하는 날이면 안방에 있던 금성사 흑백 텔레비전이 마당으로 나와 십 수 명이 넘는 식구들이 다 같이 보곤 했다.
광희동에 사는 아이들은 대부분 가까운 곳의 공립학교인 광희국민학교나 흥인초등학교, 장충국민학교에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무남독녀였던 나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서울사범대부속국민학교에 지원했다가 은행알 추첨에서 떨어졌고, 다음으로 퇴계로 5가에 위치한 동북국민학교에 신청을 해서 그 곳을 다니게 되었다.
동북국민학교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국립극장으로 공연을 보러 갈 때면 장충체육관으로 향하는 퇴계로 언덕 왼쪽편의 태광산업 부지 터에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축구로 유명한 고등학교까지 같이 사용한 운동장부터
한 반에 사 오십명 밖에 안되는 교실이 학년마다 네 개 반이 있었던 본 건물과 도서관과 양호실이 있었던 별관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어 감회가 새롭다.
콩나물시루 같았던 60-70년대 초등학교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장충동에 재벌가가 있어 경제계 자제들도 많았고 이북에서 내려와 동대문 포목시장 등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집들의 자식들도 많이 다녔고 사대문 안이라 그런지 영화배우나 정치인의 자제까지 난다 긴다하는 집안의 자식들이 많았다.
해서 난 내가 사는 경제적 수준보다 잘 사는 아이들과 친구 먹고 지내며 천부적으로 ‘계급인지 감수성’이 발달했다. ‘성인지 감수성’이나 ‘젠더인지 감수성’ 혹은 ‘장애인지 감수성’과는 전혀 다른 감수성 말이다. 그것은 내가 손해 볼 것 같다고 판단되거나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경우, 내 스스로 알아서 드러내지 않거나 철저하게 무심해지는 감각이었다.
주소를 써야 할 때 장충동이나 약수동이 아니라 광희동이라고 써야만 하는 것이 불편했다. 거짓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스스로 경계 긋는 작업에 어려서부터 익숙해졌다.
이십대에도 경기도 구리시 한강변에서 화원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구리시에서 살았다. 왜 지명이 구리게 구리시인가?
가는 길은 워커힐을 지나 박완서 소설가를 비롯 예술가가 많이 산다는 아차산 자락의 아치울을 지나 봄이면 고향의 봄 노랫말처럼 아름다운 곳이었고 버스 정거장으로
두 세정거장만 가면 닿은 가까운 곳이였지만, 내가 내리는 버스 정거장 이름은
‘한다리’ 요, 동네 이름은 교문동이었다.
이 삼 십대까지 내가 살고 있는 곳, 현주소지는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였지만 그것은 나를 규정하기도 하고, 기호화하고 상징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난해부터 일하고 있는 금천구의 주민들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금천구 주민들은 어디에서 사느냐는 질문을 받거나 금천구가 서울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불편해 한다.
마치 요즘 방송중인 주말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경기도 외곽인 수원 근처 산포시라는 가상도시, 당미역 인근에 사는 가족들이 버스가 끊긴 시각, 늦은 귀가를 위해 십시일반 차비를 모아 형제가 다 같이 총알택시를 타야하는 경기도민의 애환을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흥동이라고 하면 경기도 시흥과 헷갈리고 금천구라고 하면 영등포구, 혹은 구로구 어딘가를 떠올리지만
금천구에 대한 이미지는 흐리다.
그마나 패션아웃렛, 가산디지털단지가 고작이다. 1호선 금천구청역은 2008년 시흥역에서 청사 개관과 함께 금청구청역으로 역이름 세탁을 했고, 가산디지털단지역은 2005년에 과거 제조산업 중심에서 디지털 산업으로 전환하면서 이름이 가리봉역에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유동인구가 13만 명 수준으로 서울시내 5대 상권 중 하나로 성장하고 있다.
한편, 외지인 입장에서 내가 6개월간 보아 온 금천구는 매력적이다. 집장사가 지은 집들이긴 하지만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지방에서 서울로, 서울로 인구 이동 러쉬를 이뤘던 1970년대 주거공간으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고향같다.
아마 1920-30년대 생인 부모님대 세대에게 추억의 집들이 북촌이나 동소문동, 익선동의 한옥이라면 1950- 60년대 세대에겐 계단은 알록달록 작은 돌멩이 알들이 잔잔했던 도끼다시 바닥이고, 여기 저기 터져서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여있는 벽돌집, 덕수궁 난간에나 있을 법한 허리 잘록한 물병 모양의 받침이 베란다 난간을 버티고 있던 집들이 아닐까?
미니 2층이라고 지하에도 방을 들이고 한 켠에 연탄을 높이 들여놓았던 집.
불란서식 주택이 뭔지도 모르면서 불란서식 주택이라 불리웠던 집들. 마루바닥과
벽, 그리고 천정엔 니스 칠이 잘된 나무목으로 장식된 고색창연한 집.
그래도 마당엔 라일락과 작약이 벙그러니 꽃을 피웠던 집들이었다.
그래서 난 금천구 골목을 다닐 때 괜히 붕 뜨는 기분이 든다.
가려졌던, 혹은 가리고 싶었던 나를 내 혼자서 되찾는 흥분의 시간이랄까?
어릴 적 대가족과 함께 했던 기억이 새싹 솟듯이 비죽비죽 돋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재단 사무실에서 시흥동 생활문화공간인 어울샘이나 독산 도서관, 시흥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일부러 현대시장이나 대명시장 등 시장길을 애둘러서 가시고 하고
빙 돌아서 헤맬 것을 각오하고 골목길을 돌아다닌다.
일본작가 타니자끼 준이찌로의 ‘음예공간예찬’에 나오는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그 무엇이 음예(陰隸)이다.
문명의 갑작스런 산물이 아닌 그 무엇, 깊이와 시간 속에 절어진 손때가 묻은 그 무엇이라고나 할까 (음예공간예찬 내 123p 인용) 라는 표현은 시간의 흐름을 관통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품고있는 금천구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제 나는 어린 시절,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짓던 ‘계급인지 감수성’을 넘어 오래 살아봐서 그런지, 살아보니 인생이 별 거 아니라는 걸 경험해선지, 다행히도 ‘다양성포용인지 감수성’이 예민하게 작동한다. 근대화를 거쳐 현대화를 이룬 대한민국에서
수출의 다리를 건너며 출퇴근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피와 땀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당당해 질 수 있는 감각을 베이비부머 세대 당사자들부터 키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