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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Dec 06. 2020

찢어져도 좋다고 말했겠지


서로의 존재가 각자에게 구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슬프다. 구토를 느끼는 한편 슬픔을 느낀다. 슬픔의 한편으로 욕망을 느낀다. 너희도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조각난 나열을 넘어 장면을 구체화해 퍼즐처럼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많이도 흘렀고, 기억은 각자의 자아에 걸맞게 변형된다.


기억은 자아를 누비며 이 색을 입고 저 감정을 입는다. 화려해진 기억은 전과는 다르다, 우리는 다른 것을 되뇐다. 그렇게 인간은 가족에서 친구에서 연인에서 타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가족 같았던 친구라고 다를 게 없다. 가족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가족을 망상하도록 돕던 인간들 또한 변함없이 덧없이 떠나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너는 내게 구토를 느꼈겠지. 변함없는 구토가 내 곁에 자리한단 걸 깨닫고 나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소통 불가의 인간을 향하곤 하는 부정의 경탄을 너는 뱉었을 것이다. 모래 한 줌을 바닥에 흐트러 놓은 채로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인간은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이 말로는 합리화가 되지 않아. 너를 향했던 칼날이 이젠 나를 향하고 있다. 유약한 정신이 배출한 독은 스스로의 목을 적시고 있다. 나만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역겨운 망상이 너와 나 모두에게 상흔을 입힌 것이다. 상처에 익숙한 너는 쉬이 나를 묻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지만, 나는 이제 와서 상처가 곪아왔음을 느낀다.


움찔하게 되는 거부감, 두려움, 동작들, 언행들은 무의식에 담겨있다. 타자의 표정은 이내 우리의 표정이 된다. 단지 타자의 얼굴은 우리의 내면이 될 뿐이다. 내면의 상처, 상처가 만든 흉터. 흉터는 다름 아닌 그때의 표정인 것이다. 말도 표정이다. 말은 표정을 연상시키기에 파괴적이다. 부릅뜬 눈, 성난 주름, 모욕의 입. 언쟁이 갈아낸 칼은 그런 모양으로 정제되어 인간의 자아에 남는다.


그러니까 한번 뱉은 것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박힌 것을 꺼낼 순 없다. 이미 박아 넣은 것을 빼내려 한들, 피부는 이미 아문 뒤이다. 날은 혈관을 돌아다니며 오래도록 상처를 흘려보내겠지만, 피부는 진작에 멀쩡해져있다. 그래서 꺼낼 수 없는 것이다.


"그니까, 헤어져도 된다. 헤어져도 괜찮다. 너무 힘들어할 필요 없어. 무지개가 저기 있어" 조웅은 그렇게 말한다. 나라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겠지.


그러나 무지개가 뜨기 전엔 먹구름이 낀다. 구름의 강림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구름이 언제 지나가고 무지개를 끌고 올지는 날씨만이 안다. 그래서 비바람 한가운데의 인간은 비와 울음을 섞는 일 외엔 무엇도 할 수 없다.


우리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는 여전히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그랬고 지금의 나는 이렇다. 그때는 맞고 지금도 맞다. 우리 둘 다 틀리지 않았다. 그저 그때의 서로가 각자에게 틀려버렸을 뿐이다. 방향으로나 각도로나 엇나가버렸을 뿐이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대강 어림짐작할 때야 어울렸던 우리는 사실 아주 달랐던 것이다.


오래전 비석이 꽂힌 관계 앞에서 뒤늦게 느끼는 애도는 이 정도이다. 뱉을 수 있는 건 지금의 이것뿐이다. 나머지는 어쩔 수 없다. 놓쳐버린 귀뚜라미가 방 안 어딘가에서 울듯이, 나의 정신 어딘가에서 배회할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는 종말 앞에서 느꼈던 고양감, 허탈함, 괴리감, 역겨움, 쾌감이 각자의 똬리를 틀고 나를 노려볼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뇔 뿐이다. 무능력하고 콧대 높은 탕자들이 나지막이 어물거린다. 어쩔 수 없어. 그 말을 하지 않으면 반복되는 순간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새로운 칼을 박아 넣을 수밖에 없다. 최면을 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약자의 길을 싫어하는 척하지 않으면 초월할 수 없다. 강인한 척하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다. 여전히 나약하고 유약하여 손톱에도 갈라지는 거죽을 두르고 있음에도, 나는 강철을 입은 군인처럼 발을 옮길 수밖에 없다. 과거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구토는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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