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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May 06. 2020


거리는 정말로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나아질 줄 알았다. 나아진다기보단 내가 꿈꾸던 세상을 현실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망상했던 것이겠지, 그러나 밖을 나와 짧은 머리로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틀, 인간의 미로인 거리들은 그저 회색으로 가라앉고들 있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같은 이야기, 같은 표정, 같은 이야기들을 하며 같은 웃음들을 터뜨렸다. 향상성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아가지 못하여 안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머무르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는 것이었다.


내가 머무르길 바랐다면 나도 그곳에 엮여들어가는 가지가 될 수 있었을까. 비슷한 열매와 비슷한 풍경의 일부가 되기 위하여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억지로 하는 대화는 의미가 없다, 나는 그런 것이 싫다, 싫고 경멸스럽다. 억지의, 위선의, 가식의, 의미가 비어버린, 대화, 그리하여 생기를 잃고 활력은 오직 쾌락과 흥분에서만 야기되는, 그런 이야기들. 삶의 말들, 나는 그런 것들을 피하고 싶었다.


과거의 풍경을 마주 한지도 몰랐다, 분명 내가 안존하고 있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즐길 수가 없다. 지금의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거리는 온통 움직이는 인간들, 다리를 후덕이며 어딘가로 나아가려는 사람들만이 가득했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서점이니 회사니 학원이니 각자의 길은 목표한 지점이 있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모든 인간은 방황 중이었다. 방황임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찬 사람들뿐이었다. 정말로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눈들이 단단했다. 단단한 눈에서 뻗어 나오는 언어도 단단했다. 단단하고 공허했다. 그래서 무서운지도 몰랐다, 도시가.


아무에게도 진실할 수 없는가, 나조차도 공허로 점철되어 버리는 중이라면 나는 어떻게 하지, 나는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확정된 순간 앞에 놓였지만 겁쟁이기에 나의 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일 수도 있다. 노쇠한 때가 오면 끝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애초에 그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니체도 극한에 도달하여 정신이 돌아버렸잖아, 나는 그렇게 원대한 종말을 맞이할 자신이 없다, 그리고 종말 자체도 내겐 그랬다. 지금의 나의 끝이라면, 나의 초라한 젊음과 삶의 끝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지금 듣고 있는 이 음악도, 쓰고 있는 글도, 내리깐 눈도, 무엇을 위하여 긁어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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