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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Nov 08. 2021

앨범을 들으며 자유연상 3

Nick Hakim - Where Will We Go, Pt. 2

몽롱함을 헤집고 손에 힘을 쥐면 무언가가 잡히긴 할 것이다. 그러한 가정 하에, 하얀 것 하에 나를 펼친다. 과격하지 않게. 터져나가면 안 되니까, 다신 돌아올 수 없을 만큼 파편이 멀리 날아가버리면 안 되니까. 담담히 나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알고 있는가, 어째서 직관이란 단어에 집착하게 되는지. 토론은 말과 근거가 한 몸인 대화이다. 말에는 근거가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이러한 논리 하이다, 이의 증거엔 이러한 실험의 결과물이 있다. 나는 그것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신의 주장엔 이 부분을 근거로 오류가 존재한다.


말을 하면 따라와야만 한다. 총이 총알이 있어야 완성되듯이 말이다. 총알이 없다면 당신의 총 또한 공허한 것이다. 당신이 어떠한 주관을 갖고 말을 하던 근거가 없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나의 소타자는 지금 그렇게 말을 한다. 어째서일까. 어쩌면 극도의 주관성에 가득 차 했던 말들이 타자의 시선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공포가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근거 없는 말은 어쨌든 타자 앞에서 흩어져버리긴 하니까. 나는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간혹 어쩔 수 없이 떠오를 때면 내가 원래 그러한 인간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냥 발화자이다. 담긴 것은 정보만이 아니고 직관만이 아니고 감정만이 아니다. 혼합된 무언가, 대뇌피질과 변연계가 발달했기에 말할 수 있는 무언가. 그것들이 없었다면 언어는 그저 도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세계는 상대성이 군림하는 성이다. 누구의 말을 들어도 나는 완전히 믿을 수 없고 의심할 수도 없다. 인간과의 관계 또한 종교적 믿음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인 믿음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다. 타자를 반만 믿거나 반만 의심하면 온전한 관계들을 이룰 수 없다. 애초에 온전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만이 그러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홀든 콜필드가 느끼던 울적한 감정을 조금은 엿듣게 된다.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절대엔 무엇이 있는가. 어쩌면 내가 생의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이유도 누군가가 나를 설득해주기를 바라서인 것 아닐까. 정훈이와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는 이유는 나를 설득할만한 어떤 것이 나오기를 바라서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신이던 죽음이던 인간이던 행복이던 우울이던 사랑이던 절망이던, 나를 완전히 설득하기를 바라서인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말을 얼마나 하는 건지.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은데 문제들은 끝없이 풀어온 게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답을 찾기 위해 쏟았던 시간들이 되려 근본적인 의문과 해답의 결여를 낳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모른다는 말 안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해변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터는 기분으로, 해는 지고 있고 묘한 표정을 짓게 된다.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다음의 이데올로기를 찾아야겠지. 허무 다음엔 실존이고 실존 다음엔 구조이고 구조 다음엔 신경가소성이겠지. 그 뒤엔? 신경가소성적 특성이 발현되어 변한 나의 뇌는 나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Sleep;


눈을 감고 하늘거리며 이것을 쓰고 있다. 흐물거린다거나 흐느적거린단 말을 쓰기 싫어 굳이 하늘거린다는 말을 찾아내어 쓴다.


그러고 보면 뜻 없이 하늘거려 본 지 얼마나 되었는가. 이것이 나로서 안존하는 방법이라면 이어폰을 귀에서 떼는 일은 없어야만 할 것이다. 현자들은 귀가 타자의 말을 귀담아들으려고 두 개씩 존재한다는데, 나의 귀는 양 쪽으로 음악과 일체 되어 공간감을 즐기기 위해 생성된 듯하다. 만약 정말 그렇다 해도 아무도 딴지 걸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그저 나의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땅 위를 나온 지렁이가 간혹 밟혀 죽는다 해서 그의 방법이 틀렸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늘어놓았던 파편을 주워 담아야만 일상으로 돌아갈  있다. 흩어진 채로, 마치 거울 앞의 아기가 신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채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 하듯이. 사실 이건 엄살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오늘 새벽에는 베를린에서 공부하는 친구와 대화를 했다. 그곳에선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온 힘을 다한다고 한다. 그렇게나 다를 수가 있나. 이곳에선 아무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다. 피력되는 의견은 근거가 없거나 피상적이거나 편향적이다. 영향력이 있어야 하는 의견들은 영향력이 없다. 그럼 이 언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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