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세상을 어느 정도 산 사람들에게는 87년 민주항쟁이,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는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나 영화 ‘1987’이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한국 순정만화의 르네상스였던 그때, 나는 매달 만화잡지 ‘댕기’와 ‘윙크’의 발행일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학교 바로 옆 서점에서 두 잡지의 신간 포스터가 걸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만화방에 들러 고대하던 만화 주인공들 밀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일상은 따분하고 졸리고 지루했다. 지지부진하고 지리멸렬했다. 집안 사정으로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집 학교를 셔틀처럼 왔다 갔다 하는 신세였다. 만화방과 만화는 나에게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구멍이자 도피처였다.
수많은 만화를 보았다. 아뉴스데이, 불새의 늪, 북해의 별, 비천무, 아르미안의 네 딸들, 점프 트리 A+. 그리고 핵폭탄급 비주얼 충격을 안겨 준 호텔 아프리카까지.
호텔 아프리카는 기존의 순정만화와 달랐다. 다른 만화들은 모두 스토리 위주였다. 호흡이 길고 서사가 웅장했다. 주인공이 시련을 많이 겪기 때문에 과장되고 청승맞은 면도 있었다.
반면에 호텔 아프리카는 스토리와 서사를 대폭 축소하고 비주얼과 감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긴 흐름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대신 짤막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스타일이었다. 만화 언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상 언어에 가까웠다.
1970년대 미국 유타주의 호텔 아프리카와 1990년대 뉴욕을 왔다 갔다 하는 세련된 구성. 발랄한 백인 처녀 아델과 흑인 음악가 트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앨비스, 강해 보이지만 내면의 슬픔을 간직한 줄라이, 그리고 금지된 사랑에 빠진 에드. 이 세 친구가 주인공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소외되었거나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배경도 외모도 성격도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고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위로를 주게 된다.
호텔 아프리카는 또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가족 간의 따뜻한 정에 굶주려있던 나에게 호텔 아프리카가 그려내는 세상은 이상적인 가족 그 자체였다.
완전한 남남들이 가족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앨비스, 줄라이, 에드 이 세 명이 사는 뉴욕의 아파트는 선망과 동경의 대상, 자유로움의 상징이었다. 17세의 여고생이었던 나는 언젠가 영혼의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처럼 따뜻하고 어른스러운 우정을 나누리라 마음먹었다.
남자 주인공이 두 명이나 나오는데도 호텔 아프리카는 페미니즘적인 작품으로 다가왔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몰랐는데도 그랬다. 나중에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보고 호텔 아프리카를 떠올린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초라한 ‘바그다드 카페’. 커피머신은 고장난지 오래고, 먼지투성이 카페의 손님은 사막을 지나치는 트럭 운전사들 뿐이다.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을 쫓아낸 카페 주인 ‘브렌다’ 앞에, 남편에게 버림받은 육중한 몸매의 ‘야스민’이 찾아온다.
<출처: 네이버 영화>
태생과 살아본 배경이 다른 이방인들이 '소외'와 '외로움'이라는 공통점만으로 가족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되고 이들의 안식처를 우연히 찾아온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그 모습은 호텔 아프리카의 잔잔한 에피소드들을 꼭 닮았다.
그 이후로도 바그다드 카페의 주제가 ‘Calling you’가 나오면 이 영화가 아닌 호텔 아프리카의 장면들이 머리 속으로 스쳐 지나가곤 했다.
지금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낯선 곳에 가서 작은 카페를 열고 손님이 와도 그만, 오지 않아도 그만인 그런 나른한 나날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