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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퇴폐적인 영혼의 만화가 '이정애'를 만나다

순정만화가 열전 (2)

by 줄라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우연한 계기로 좋은 아이들과 친해졌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바로 갔지만 가끔 이 친구들과 어울려 떡볶이도 먹고 만화방에도 갔다. 그 전까진 흥미만 조금 갖고 있었던 만화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계기가 바로 이 아이들이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재미있게 봤던 만화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때 만난 개성 있는 그림체의 만화책이 바로 이정애 씨의 데뷔작 '헤르티아의 일곱 기둥'이었다.



사실, 그 아이들과 친하게 된 것은 나의 의도적인 접근 때문이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친구들과 늘 일정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날 반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아이, M을 보게 되었다. 그냥 그 애가 좋았다. 딸 부잣집(딸 5명)의 중간 딸이었던 M은 이미 주변에 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여자 아이들이란 한번 친구 그룹이 정해지면 그룹 밖의 아이들에게 배타적이 되곤 한다. 더구나 때는 한창 예민한 중3이다. 다른 아이의 영역 침범을 반길 리 없었다.


M의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그 아이와 친해지려면 주변 친구들과 친해지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데 겁을 내고 서툴렀지만 M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전략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무조건 같이 다녀야 했다. 그 애들이 가는 떡볶이집, 자주 찾는 만화방, 놀이터 같은 장소에 같이 몰려다녔다. 아마 한 명이 아닌, 그룹의 친구들과 몰려다녔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로 나는 M과 친해졌다. 그런데 나중에는 M만큼 다른 아이들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생각하지 않았던 일도 일어났다.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내가 M만 좋아한다며 은근한 질투를 표시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어렴풋하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한창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은 나이였지만 주변에서 이성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그때는 남녀공학이 아니었으므로).


주변에서 보는 또래 남자아이들은 요즘 말로 '극혐'이었다. 지저분했고 유치했고 덜 떨어져 보였다.


아이들은 비루한 현실 대신에 판타지를 택했다. 순정만화에서 높은 이상에 걸맞은 상대를 찾았고 현실에서는 또래 친구들 중 '선택된' 아이에게 넘치는 마음을 주었다.


정신적인 '동성연애'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순정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성애적' 코드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남신'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다운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은 바람직하게 자연스럽고 느껴졌고 야릇하게 선정적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다시 이정애를 만났다. 나는 만화 동아리에 가입했고 그 명분으로 만화책을 두루 섭렵했다. 고3의 암흑기를 지나 좋아하는 만화를 실컷 읽게 된 자유로운 시기였다. '성홍열, '키 큰 지나의 다리' 등 이정애의 단편은 뭔가 가슴이 찡하고 깊은 울림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이정애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면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루이스씨에게 봄이 왔는가?'의 데카당스함, 조금 더 과감했던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 수첩'의 퇴폐미도 기억에 많이 남았다.


그러다가 '열왕대전기'에서 이정애 만화 세계의 끝판왕을 만났다.


미완성으로 남은 이 작품이 완성되었더라면 종잡을 수 없는 이정애의 정신세계를 확실히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이졍애는 스케일이 큰 작품도 잘 그려내지만 단편에서도 독특한 세계관과 애정관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단편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뭔가 좀 따스하고 본능적이다. 내가 봤을 때, 이정애의 사랑은 오래 지켜보면서 싹트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자신의 아픔을 투명하는 연민은 아니다.


그보다는 첫눈에 반하고 논리나 이성을 결여한 '이유 없는', '맹목적인' 사랑에 가깝다. 순정만화 특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은 어쩔 수 없다. '예쁘기 때문에' 끌리는 것은 당연히 용서된다. 다만, 전형적인 남녀 주인공의 외적 특성이 뒤바뀐 '아테르타 연대기'에서처럼 그 예쁘다는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20대가 되면서 10대와 달리 이성에 대한 생각이 막연함에서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정신적이고 순수한 사랑보다는 안고 만지고 핥아주는 본능적인 사랑에 더 끌렸다. 이정애의 작품들에서 그런 욕구를 대리 만족했던 것 같다.


지금 내 생각은 반반이다. 사랑의 출발은 '맹목적이고 이유 없음', '호르몬의 장난'이 맞는 것 같고, 그 사랑이 계속 발전하려면 '연민'이나 '공감', '가치관의 소통'이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보니 결정적으로 일상의 '아웅다웅', 지지고 볶는 과정에서트는 '정'이 사랑의 본질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이정애 만화의 코드는 '특별함', '선택 받음', '엘리트주의', '운명', '절음과 아름다움의 찬미' 같은 것들이다. '특별함'에 대한 갈망과 동경, 찬미는 모든 예술 작품의 공통된 특성이다.


인간은 특별하지만 '개별 인간'은 약하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문학 작품, 예술 작품에서라도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고 우월한 존재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수많은 슈퍼히어로물, 영웅담, 공주 스토리를 탄생시켰다.


이정애는 무겁고 진지하기만 한 작가는 아니다. 그녀의 괴짜스러움은 유명하지만 유머감각도 뛰어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정애 만화의 본질은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특유의 자유스러움과 한계 없는 상상력이다. 그 자유분방함과 데카당스함이 그립다.


그녀도 이제 나이가 들어 부드러워지고 현실과의 타협을 용인하게 되었을까? 50대 중반의 그녀는 어떤 모습일지, 그런 그녀가 그려내는 만화의 세계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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