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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Feb 15. 2020

일상의 칸막이, 사회적 관계의 디톡스

주재원 생활이 나에게는 뜻하지 않게 '일상의 단절'을 가져왔다.


원하지 않았는데 주어졌으니 '억지로'가 밎지만, 그 결과는 행복한 쪽으로 나타났다. 익숙한 환경, 일상과 단절되고 낯선 환경에 놓였다. 그럼으로써 관성에서 벗어나 그때 그때 내 욕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여기서의 '외부', 즉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이 상황은 나에게 일종의 hiatus, sanctuary를 제공해 준 셈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자신도 없으면서 유튜브나 책쓰기를 시작하고 성과도 없으면서 6개월간 유튜브를 계속 할 수 있었던 것도 낯선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잘되든, 잘 못되든 아무도 모른다. 아니, 여기서 '외부'는 내가 그런 것을 하는지도 모르고 기본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일종의 디톡스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시선, 스스로 자신에게 부과하는 부담으로부터의 간헐적 해독이다.  


이 인생의 단절기, 휴식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 요즘 한달 살기, 1년 살기가 유행인 것도 완전히 낯선 환경, 사회적 관계 제로 베이스에서 가볍게,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반영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현재의 주재원 생활은 큰 행운이다. 운 좋게(?)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해도 비슷한 경험을 해볼 수는 없을까? 누구나 '모든 사회적 부담이 일시적으로 소거'된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사회적 디톡스를 정기적으로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생각한 것은 '일상의 칸막이'를 만드는 것이다. 주재원 기간이나 1년 살기는 어쩌면 '인생의 칸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연히 주어졌든, 본인이 원해서 만들었든 간에, 삶의 어느 한 기간을 칸막이해놓는 것이다.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평소의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보겠다고 아예 X 표시를 해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방식을 일상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그럼 장소를 옮기지 않아도 일상에 칸막이를 치는 효과가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하는 시간과 휴식시간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다. 고민이 있어도, 걱정거리가 있어도 휴식시간으로 지정된 칸막이에서는 철저히 잊는다. 말 그대로 refresh 시간이니까.


나는 이렇게 하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퇴근하면 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잊는다. 그의 refresh 방법은 TV 시청이다. 잠들기 전에 매일 TV를 1시간 이상 본다. 집중하지는 않는다. 그냥 틀어놓고 정신을 방전시킨다. 왜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냐고 물으면 '이렇게 리프레쉬해야 내일 또 힘을 내서 일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전에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간에 칸막이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할 때는 일 이외의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일만 한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본 바쁜 도시 직장인 중에서 가장 밝은 표정과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 중 하나다.


나처럼 운 좋게 인생의 단절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도 시간의 칸막이는 필요하다. 매일 매일을 새로운 일만 하면서 보낼 수는 없으니까.


내 경우에는 1주일에 4일은 정해놓은 일을 하고 1일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 보내고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편이다. 평일에는 스케줄러에 해야 할 일을 적어놓고 되도록 다 하려고 노력한다.


나머지 3일도 스케줄러를 적기는 한다. 하지만 이 스케줄러에는 평일에 하는 일은 적지 않는다. 평소 시간을 핑계로 못하는 일을 꼭 1개씩 넣는다. 물론 스케줄러를 완전히 무시하기도 한다.


그러고보니 현대 사회에서 일상에서의 휴식이란 굳은 의지를 필요로 하는 활동이 되어버렸다. 이 상황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돈을 많이 벌어 은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생계 유지를 위한 돈이 있어도 사회적 관계와 지위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일상을 칸막이하고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방해거리와 고민거리를 몰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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