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가 지속되면 목구멍과 정수리에서 용암이 끓는 것만 같다. 이럴 땐 운동이 최고다 싶어 탄천으로 나왔다. 스트레칭을 하며 평소처럼 좋아하는 유튜버의 컨텐츠를 들을까 하다가 정보성 인풋이 들어오는걸 온몸에서 거부하길래 음악을 듣기로 했다. 요즘엔 송대관 선생님 노래가 그렇게 좋다.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한 노랫말과 뱃속에서부터 뻐렁치는 감정을 담은 그의 노랫자락이 듣느니 마느니 한 음악들로 허해진 기력을 꽉 채워주기 때문이다. 한창 <해 뜰 날>에 빠져있다가 요즘엔 <차 표 한 장>으로 옮겨갔다. 이렇게까지 사람 귀를 휘어잡는 모티브 리듬과 가사를 붙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동동 동동 동동 동동- 기차가 달려오는 소리를 표현한 인트로가 흘러나오면 내 가슴도 어딘가로 떠나기 직전의 사람처럼 붕 뜨기 시작한다. 구슬픈 첫 코드가 나오기 직전까지 말이다. 음악이 흐르면 화성이 서글퍼서 내 마음도 서글퍼지려 하는데 뒤에서 드럼과 스트링이 힘차게 쭉 뻗어 나와 내 마음을 덥썩 잡는다. 울지 말라고, 무너지지 말라고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주는 듯한 투박하고 두터운 손과 같은 기운이 좋다. 힘을 받아 달리기를 시작하면 곧이어 송대관 선생님이 노래를 시작한다.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야 하네
예정된 시간표대로 떠나야 하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랑했지만 갈길이 달랐다
이별의 시간표대로 떠나야 했다
저 이별의 시간표라는 가사를 스쳐갈 때마다 일부러 더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도무지 앞뒤를 알 수가 없어. 관계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람의 마음은 앞에서 보이는 것만으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너는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가 있는지, 너는 또 어떻게 내게 그럴 수가 있는지 울분이 터지다가도 그들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미리 대처할 수 있었던 건 없었을지 생각했다.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과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불안한 예감이 드는 관계들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엉켰다. 다른 무엇보다도 다시는 누군가를 믿고 싶지 않아진 내 마음의 변화가 제일 속상했다. 타인과 세상을 믿지 않는 딱 그만큼 내 삶도 메마르고 건조해질 수 있다는 걸 과거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나는 얼마나 무미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 될까.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그럼 어디로 가야할지 보이지 않아 막막했다. 오늘은 한 코스로는 안 풀릴 것 같아서 30분짜리 코스를 두 번 반복했다. 한 시간을 뛰니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몸은 지쳐 무거웠는데 속은 한결 가벼웠다. 들끓던 숨이 순해져서 살 것 같았다. 마음이 머금고 있던 물기와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와 그런가보다. 집에 가기 전에 잠시 쉬고 싶어서 이어폰을 떼고 거꾸리에 매달렸다. 자정 너머의 탄천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옆에 물이 흐르지만 않는다면 몸에 열이 가라앉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만세를 한 상태에서 숨을 단전 끝까지 들이켰다 내쉬었다. 뜨거운 숨을 내뱉길 몇 번 반복했더니 발 끝에 쏠려있던 피가 정수리에 닿는 게 느껴졌다.
문득 이쯤이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답이라고 일컫어지는 사회의 기준들이 정말 내게도 맞는 건지 의구심을 품는 일도, 그래서 아예 다른 나라 문화권에선 어떻게 삶을 바라보는지 가리지 않고 궁금해했던 것도,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삶에 대한 관점을 넓히고자 했던 것도, 다른 나라 언어로 최대한 정확하게 소통하고자 애썼던 일도, 그래도 모국어로 전달하는 것보다 늘 덜할 수밖에 없어 아쉬운 마음을 품고 사는 일도, 내가 살아온 문화권을 이미 자신들의 것보다 위 혹은 밑의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잡힌 사람들에게 세상에 반드시 좋기만 하거나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일도, 그럴 때마다 세상에 격은 존재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과 충돌하는 일도, 애매모호한 관계를 견디지 못해서 뭐든 확실하게 정의해 놔야 성이 풀리던 나의 성격도,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기대하게 되는 일도, 내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도, 이를 투사해서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로 타인이 바라지 않았던 무언가를 주고서 혼자 착각하는 일도,
네가 신중해질 때가 됐나 보다. 최근 주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밖을 보던 눈을 돌려 안을 보니 세상과 나 사이 선이 희미한 실금이었다. 그래서 얻은 것도 많았지만 이제는 덜 다치고 싶어어. 친한 사람들에게 아픈 건 싫다고 털어놓았더니 그건 당연한 거라고 했다. 그동안 나를 분명하게 정의 내리면 삶의 다양한 가능성이 닫히는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이제는 잘 닫는 것도 좋은 삶을 위한 성숙한 태도 같다. 적어도 지금 내겐 그렇다. 요즘엔 뭐든 단순히 생각하고 끝내고 싶어서 어디로든 새 길이 틔이겠지 하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