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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을 가꾸는 건축가 Jul 24. 2022

들판의 카드 섹션

4계절 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자연의 황홀감

한여름 짙어진 잎만을 지닌 채, 돌 틈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비꽃을 볼 수 있었다. 봄의 기운으로 땅이 녹기 시작할 때, 차가운 아침 이슬을 맞으며 자신의 소중한 모습을 드러내었던 그였다. 아름다운 모습에 눈이 즐거웠는데, 꽃이 진 후로 그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여름날 봄에 꽃이 피었던 자리에, 몇 장의 잎을 지닌 채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은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년이라는 시간을 단위로 한 카드섹션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모든 식물들이 1년 내내 계속해서 꽃을 피운다면 결코 이런 다채로움은 있을 수 없겠지.

각 개체들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들의 화려함을 드러낸 결과이다.

모든 식물의 개체들이 자연이라는 3차원의 공간을, 그리고 시간이 개입된 4차원의 시공간을 공평하게 나누어 쓰고 있기 때문에 일사불란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지라는 2차원을 자신들의 영역별로 나누어 쓰고, 꽃이 피는 높이를 각각의 개체들이 정해서 쓰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서 꽃들이 피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 이런 모습은 당연히 생물체의 종족 번식의 본능이겠고, 타 식물과의 과도한 경재 - 종종 번식을 위한 - 을 피하기 위한 그들만의 방식임이 분명하다.      

제비꽃과 냉이 꽃들이 들판을 덮고 있었다. 봄에 다른 풀들이 조금씩 머리를 밀어내고 있을 때, 군데군데 머리를 들고일어나는 솜방망이의 부드러운 노란 꽃들, 그리고 안개에 가린 것 같은 붉은색을 지닌 할미꽃...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현삼과의 꽃들, 붉은빛을 내며 제비꽃보다는 조금 더 큰 키를 가진 꿀풀과의 꽃들, 들판을 붉게 물들이는 엉겅퀴의 물결이 일어날 때쯤이면 여름이 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한여름 짙은 푸름에 화려했던 꽃들의 색깔이 숨어 버린 것인지. 그런 가운데서도 군데군데 눈길을 끄는 붉은빛의 말나리가 보인다. 군데군데 모여서 서로의 키를 재려는 듯 삐죽삐죽 올라오는 무릇의 무리들... 들판을 노랗고 하얗게 물들이는 마타리, 뚝갈이 물결이 있을 때쯤. 한창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닭의 장풀의 보라색 꽃과 달맞이꽃들... 국화꽃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들판을 덮는 지금이 가을인가 보다.

자연이 마지막으로 하얀색의 카드를 보여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매번 다양한 꽃들을 선사해 보여주고 있는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똑같은 자리에서 시간이 지날 때마다 보라색, 노란색, 흰색, 빨간색, 분홍색 꼴들이 번갈아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 똑같은 식물이 계속해서 다른 꽃을 피우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 번쯤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도대체 들판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이름 모를 개체들이 대지를 빼곡히 매운 채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의 꽃이 피어 있는 동안, 벌써 꽃을 피웠거나 피우기 위한 개체들을 피어 있는 꽃의 녹색의 바탕화면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피어 있는 꽃을 제외한 다른 개체들은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단계에 있는 것이다. 다른 개체들이 자유롭게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지켜주는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을 가시적인 면만들 보고 판단하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화려한 꽃이 진 후에 모든 자연의 공통 색깔인 녹색의 잎을 지닌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너무 무관심했다.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 1년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여름날의 뜨거운 태양과 봄, 가을의 차가운 이슬을 이겨낸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가. 가시적인 꽃만이 아니라, 그 꽃을 피우기 위해서 뒤에 물러서 있는 동그란 잎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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