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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19. 2020

(#078) 2018. 9. 26.

Burgos 18.6km

오전에 아침식사를 하며 이 곳 사람들이 모국어와 영어를 할 때 억양이 묘하게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다. 영어를 쓰면 기분 탓인지 조금 더 단호하고 쌀쌀맞은 느낌이 든다. 미시는 싼타페라는 이름의 펍,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근무하는 데에도 종업원들 표정이 Happy 해 보이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여행자로 매일 새로운 곳을 다니는 우리와 단순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종업원들 입장에서는 매일 맞는 똑같은 하루이니 우리에게 설레는 순간도 그들에게는 질리는 일상 중 하나라는 게 역설적이다.

누군가 남긴 졸라맨 가족 그림. 반려동물과 함께 걷는 순례자 가족이 들렀었나보다. (c)밀린 일기



도시로 들어가는 길에 평화로운 공원 구간이 있다. 외곽에서 연결된 공원을 통과해 도심지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개천에서 한가로이 날개를 말리는 물오리들을 지나 끝없이 자란 기둥에 커다란 버섯이 자란 오솔길을 빠져나와 도시로 들어왔다. 반질반질 윤이나는 돌바닥과 사람들로 넘쳐나는 거리는 무척 새로웠다. 그동안 인적 드문 곳만 걸었더니 인파가 북적이는 길거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커다랗게 자란 나무들이 도시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 했다. 울창한 가지 덕에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c)밀린 일기



마침내 광장에 도착하니 오며 가며 보던 얼굴들이다. 새라와 대니얼은 전 날 40km를 걷고 지금은 아파트를 빌려 잠시 쉬고 있다고 했다. 로그로뇨 와인축제에서 진탕으로 취해 같이 떠들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만난 김에 사진도 찍었다. 거리를 배회하던 타카도 2번이나 다시 만났다. 미시와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쎄요를 받은 후 계단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는 공립 알베르게 접수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무릎 부상이 심각해진 미시는 호텔에서 며칠 쉬기로 해서 체크인을 도와주러 갔다.

결국 미시는 완주하지 못한 채 귀국하게 되었다. 첫 번째 완주에 실패하고 두 번째 도전이라 몹시 안타까워했다. 문득 어느 노년의 순례자 말이 떠올랐다. 까미노는 언제나 그 길을 걸을 최고의 순간을 기다렸다가 순례자들을 부른다고. 아쉽지만 미시에게 알맞은 순간은 아니었나 보다.

진한 초콜릿에 찍어먹는 츄로스. 달달하고 고소한 게 들어가니 피로가 한달음에 가셨다. 그러나 맞은 편 식당에 한국 라면을 판다는 사실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마도..(c)밀린 일기



큰 도시의 성당은 내부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으니 잠시 들르기로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순례자에게 입장료가 할인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11세기에 처음 짓기 시작한 성당은 프랑스식 고딕 양식으로 마감되어 첨단이 뾰족뾰족했다. 거대한 외관에 걸맞게 내부도 상당히 넓었고 부분 부분 증축과 보수를 하며 몇 세기에 걸친 건축 양식이 혼합된 구조였다. 공간을 지나면 다른 세기의 양식을 볼 수 있어서 한 공간에 있다는 게 무척 신기했다. 지하로 내려가면 가장 최초에 지어졌던 공간도 볼 수 있었다.

종교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까미노를 걸으며 사람들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주워 들었다. 알고 보니 로마 가톨릭에서 대성당은 기사가 있는 도시에만 지을 수 있고 그 밖에는 작은 교회만을 둔다고 한다. 따라서 대성당이 있는 도시는 세가 꽤 큰 도시라는 것을 역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파란 하늘을 뚫을 듯 높게 솟은 뾰족한 골조와 방대한 구조에 놀라고 내부에서 제단을 장식한 금 장식과 끝없이 늘어선 백색 아치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c)밀린 일기


나무 숲이 인상적이었던 길가 근처 식당에서 미시와 마지막 점심을 함께 했다. 이 큰 도시도 시에스타가 되면 어김없이 거리에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 적당히 노곤하고 한가로운 오후가 지나간다.


숙소로 돌아와 빨래를 마저 하고 침대에 잠시 누웠다.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늦은 오후 동네 아이들이 뛰노는 웃음소리, 정각에 맞춰 울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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