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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18. 2020

(#077) 2018. 9. 25.

Atapuerca 18.2km

달무리가 아름답던 아침. 오랜만에 여섯 시에 출발했다. 새벽 네다섯 시부터 무척 부산스러웠는데 까미노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한국인들이었다. 사위가 어두운 탓인지 꿈결을 걷는 듯한 느낌이라 아침에는 오래 걸어도 덜 피곤하게 느껴진다. 어느새 아침에 새는 입김이 제법 뽀얘졌다.

달무리가 길을 밝히자 미시와 나는 잠시 조명등을 끄고 천천히 아침을 밟았다. (c)밀린 일기



새벽에는 길눈이 썩 밝지 않은 데다 가끔 덜렁이는 우리는 여지없이 길에 흔적을 남겼다. 미시는 팔토시를, 나는 장갑을 떨궜는데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주워다 주인을 찾아주었다. 모양새를 보면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인 걸 아는 모양이다.

오늘은 길에서 가족인 듯 보이는 프랑스인 네 명을 자주 만났다. 안부를 물으면 Nous aussi!(우리도!) 하고 씩씩하게 걷는 자세를 취했다. 한 번은 마을로 오르던 길가에 주저앉아 귀를 부여잡고 있길래 아픈가 걱정했더니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쪽잠을 자는 중이란다. 까미노 위에서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식으로 서로를 챙겨준다. 짐이 무거운지, 약이나 물 같이 필요한 게 없는지. 이 낯설고도 당연한 친절함이 정말 큰 힘이 된다. 예전에 쎄요를 받으며 눈물을 쏟았던 교회에서 만난 한국인 가족은 귀한 홍삼진액을 나눠주었다. 세상은 아직 살만하고 우리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마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매일 새롭게 배운다.

미시와 잠시 쉬었던 쉼터. 까미노를 찾는 한국인들이 많은 탓인지 곳곳에 태극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게 무척 반갑고도 신기하다. (c)밀린 일기



커피 스탑에 가면 꼭 다시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은 부르고스를 향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갔으려나. 길에서 만난 누군가가 그랬다. 길에서 사람들을 다시 보는 것은 무척 좋지만, 자꾸 채근해서 걷지 않으면 엎치락뒤치락 걷던 이들이 모두 앞서가 다시 만나기 힘들다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모두 산티아고에서 재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내 속도대로 걸을 뿐이지만 이 좋은 인연들을 잃는 것이 많이 아쉽고 두렵다.

오늘은 스페인식 코코아 Cola cao에 깔조네처럼 생긴 샌드위치를 아점으로 먹었다. 콜라 카오는 중독되면 헤어나올 수 없다. (c)밀린 일기



길에서 날듯이 걷는 모라를 만났다. 모라는 중간 마을에서 쉬지 않고 곧장 부르고스까지 간다고 했다. 오늘 날도 좋아서 이 기세라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모라의 붉은 머리와 달랑거리던 귀걸이가 인상적이다.

미국인 에밀리오에게는 쌍둥이 아들들이 있다고 했다. 집에서 직접 지팡이를 만들어 왔는데 손잡이 매듭을 아들이 해줬다고. 30년 간 해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해 골든 펜션을 받는 마지막 세대라고 했다. 네이비 씰이야 워낙 유명하니 그의 풍채가 예사롭지 않은 데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훌륭히 일하신 뒤 은퇴 후 삶을 즐기시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미시가 본명인 이름(멜리사)을 소개했더니 동네에선 경찰들이 많이 쓰는 이름이라며 절대 안 까먹겠다고 하셔서 우리는 다 함께 웃었다.

카페 옆에 있었던 성 니콜라스 교회. 좌측 종탑 세개는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스페인의 어느 공주인가 여왕이 이곳에서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자손을 본 후 유명해졌다. (c)밀린 일기



아타푸에르카는 선사시대 유적이 유명한 곳이다. 마을 부근에는 아직도 고고학 연구가 한창인 유적지가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청동기 시절 출토된 유물과 발굴 현장을 구경할 수 있지만 뙤약볕에 지친 우리는 그냥 쉬러 가기로 했다.

몇몇 사람들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유적에 들렀는데 기대보다는 덜 흥미로웠다고 한다. (c)밀린 일기



미시가 알베르게 중 프라이빗 룸을 예약했다. 방 안에 화장실이 있었고 침구도 깨끗한 방이었다. 먼저 대접해주고 싶다고 해서 너무나 감사했지만 동시에 부담도 됐다. 함께하는 여정은 즐겁지만 이대로 굳어지는 것은 어쩐지 아쉽다. 예전에 타카가 말한 대로 각자의 페이스가 있으니 둘 이상이 함께 다니면 페이스 조절할 때 어려움이 있다. 다행히 우리는 걷는 속도가 비슷해서 크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때때로 고독이 그립다.

알베르게에 장식되어 있던 코르크로 만든 화살표. 이런 귀여운 소품이 곳곳에서 눈길을 끄는 아주 예쁜 곳이었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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