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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17. 2020

(#076) 2018. 9. 24.

Villafranca Montes de Oca 13km

부르고스 도착시간을 맞추느라 여정을 짧게 끊어가는 중이다. 거의 30 킬로미터쯤 걸은 날이 있는가 하면 오늘처럼 걸은 날은 너무나 가뿐하다. 사방에 그려진 화살표가 혹여라도 길을 잃을 순례자들을 염려하며 그려져 있다. 의무를 다하는 그 노란 화살표들을 보면 간혹 비현실적이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도로시가 황금빛 보도를 따라가듯 그저 그 표식을 따라 이 길이 끝날 때까지 걸어가 본다.

오래 걷다보면 힘이 들어 시선은 절로 땅을 향한다. 그때 만난 동네 꼬마들의 반가운 흔적. (c)밀린 일기



벨로라도 알베르게에서 연락이 내 엇갈리던 하비와 루이스를 이튿날 아침 카페에서 만났다. 만날 인연이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게 순리라는 걸 곱씹는다. 뺑 오 쇼콜라에 커피를 곁들이며 먹다가 발견한 그들에게 소리쳐 발걸음을 잡았다. 만난 것도 기념이라고 사진을 남겨두었는데 미씨는 아무래도 이 스페인 아저씨들의 태도가 영 수상쩍단다. 나랑 열너댓 살은 차이 날 텐데 대하는 게 딸뻘이 아니라 친구에 가깝다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 마인드는 그려려니 하고 넘겼지만 적당한 선은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맥주, 커피, 와인이 한 데 어우러진 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c)밀린 일기



이름도 길고 어려운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까에 드디어 도착했다. 작은 마을이라 사설 알베르게뿐이었고 개중 다음 날 출구에 가장 가깝고 커다란 곳을 골랐다. 이 알베르게는 마치 마법의 장소 같았다. 길에서 떠나보낸 사람들과 신기하게도 모두 만났던 것이다. 몇몇 한국인들을 비롯해 요한나, 첫날 같은 알베르게에 묶었던 타카, 힘겨운 아침에 경쾌한 응원을 보냈던 조쉬까지. 기약 없는 여정에서 다시 아는 사람들을 만나자 어찌나 반갑던지!

쪽문이 아름다웠던 알베르게. 주변 경관이 유명한 곳이란다. 사실 나는 풍경보다는 음식이 더 중요하기는 하다. (c)밀린 일기



아일랜드에서 온 모라는 전날 빨래한 등산 양말이 마르지 않아 전자레인지에 돌리려던 한국인 하나를 구제해줬다고 한다. 자기가 가진 양말을 하나 더 주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전자레인지를 지켜냈다니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다. I am independent and strong woman이라며 잠시 쉬었다가 그래도 부르고스까지 간다고 해 모두가 박수치며 응원했다.


침대 벼룩 감식관 미시가 이번엔 기어이 벼룩을 찾아내고 말았다. 프런트에 항의하고서 우리는 좀 더 나은 방으로 배정받았다. 모르고 넘어갔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벼룩을 옮길 수도 있었으니 때론 정당하게 항의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 내가 가장 못하는 부분이자 남들이 척척해내면 가장 부러운 부분이었다.


모처럼 여유로운 점심을 즐기며 알베르게의 와인바에 들었다. 잠옷으로 낙낙한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다들 애인꺼냐며 놀리기도 했고, 파자마를 챙겨 온 내가 Super cozy해 보인다며 부러워했다. 바에서 만난 프랑스인 퀸턴, 이스라엘인 로나, 벨기에의 이름 어려운 친구와 넷이서 우노를 했다. 각자 약간씩 취해있어서 게임은 한층 스릴 만점이었다. 기분 좋은 취기와 반가운 사람들에 둘러싸여 맞는 밤은 정말로 달콤했다.

일찍 도착한 순례자들은 짐을 정리하고 하나 둘 나와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내일 아침 이 길은 길 떠나는 순례자들로 가득 찰테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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