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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 Dec 31. 2020

장난감 칼을 든 히어로, <보건교사 안은영>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 보건교사 안은영


넷플릭스의 여성들 01

보건교사 안은영 (The School Nurse Files)

분량 : 1시즌 6화

평점 : 4

우리가 히어로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장가의 최고 인기 장르라면, 역시 히어로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녀노소 누구나 열광하는 장르다. 대표적으로 한번 개봉하면 극장이 난리가 나는 마블코믹스의 영화가 그 예시라고 할 수가 있겠다. 취향이 아닌 사람도 있겠으나, 정말 많은 팬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히어로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히어로 영화가 주는 어떤 카타르시스가 있음은 분명하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이 승리하고, 주인공이 세상에 가지는 그 고결한 책임감과 압도적인 힘을 보게 되면 알 수 없는 쾌감이 솟아난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어떤 힘도, 그런 용기도, 언제나 이기는 선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안은영


 <보건교사 안은영>은 아주 이상한 히어로다. 드라마는 정신없이 발랄한 고등학생들의 모습과, 피곤한 인상의 헝클어진 검은 머리의 여자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뭔가 이상하다. 히어로의 힘의 상징인 무기, 강철 같은 몸, 그런 것은 없다. 안은영은 조악한 플라스틱 칼을 들고, 온몸에는 젤리들에게 물린 상처가 있어서 언제나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티를 입는다. 영웅들이 으레 가지는 이상할 정도로 투철한 책임감도 없다. 습관 같은 한숨을 내쉬며 사건을 해결한다. 전 지구적 재앙이나 세계평화와 미래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다. 그저 눈앞에 있는 작은 불행들을 헤치면서 살아갈 뿐이다. 명성과 응원, 멋진 활약상, 그건 먼 얘기다. 은영이 싸우는 세상은 외롭고 화려하다. 누군가 그걸 볼 수 있다면 그녀를 영웅으로 치켜세울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없었다.


 드라마 초반의 안은영은 아주 고독해 보인다.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형성할 생각도 없고, 남들이 이상하다며 쑥덕대는 것도 은영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안은영의 세계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볼 수 없는 이상하고 화려한 색으로 가득했으며, 이 색들은 사람들의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욕망은 흘러나와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욕망이 남아서 안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예쁜 색의 위험들이 그의 적이다. 은영은 그것을 젤리라고 부른다. 성의 없이 젤리를 툭 툭 때려가며 오늘의 할 일을 한다. 심지어 은영의 주 무기인 장난감 칼과 총은 무제한 사용도 불가능하다. 토르의 묠니르와는 아주 다른 물건인 것이다. 여기는 문명이 발달한 우주도시가 아니주어진 것에서 해결하는 수밖에.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학교에서 조금 더 편하게 살고자 함은 사치다. 그때 한 사람을 발견한다.




인표와 강선


 홍인표, 마치 은영의 보조배터리 같은 한문 교사다. 처음 잡는 순간 알았다. 은영이 젤리를 물리칠 때 쓰는 힘이 충만하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인표는 처음으로 은영에게 파트너라는 자리를 부여받는다. 이 세상에서 은영이 하는 일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뿐이었다. 은영이 가족처럼 생각하는 동네 언니이자 이 학교를 소개해준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학교가 매일 난리인지. 은영이 아무것도 없는 곳을 화려하게 가르며 전진하는 걸 보면, 우리는 그런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은영은 어떻게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젤리와 맞서게 되었을까? 이건 은영의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김강선, 은영의 첫사랑이자 어린 시절 친구다. 짝이 된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가 기피한다는 거였다. 강선은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소문이 나서, 은영은 귀신을 본다는 소문이 나서 그랬다. 은영은 어느 날 강선의 괴물 그림을 보고 그것이 내 세상과 같다고 말한다. 강선은 은영에게 캐릭터를 바꾸라고 제안한다. 그게 뭔데? 우울하고 슬퍼하며 살지 말고, 유쾌하게 사랑받으며 살라고. 그때부터 은영의 무기는 장난감이 되었다. 강선이 은영의 캐릭터를 그렇게 만들어 준 순간부터.

 인표와 강선, 은영의 현재와 과거. 이 드라마에서 주목할 남성은 앞서 소개한 딱 두 명뿐이다. 학교의 아이들은 사건을 이끄는 주체이긴 하지만, 주로 은영이 해결하고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다. 그 외에 이미 세상을 떠난 전 교장선생님(인표의 할아버지)나 다른 교사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안은영과 여성들


 드라마 내에서 은영과 세상을 공유하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은영이 마음으로 제일 의지하는 동네언니 화수와 알고 지내는 병원 의사, 어렸을 때부터 함께하던 귀신 친구, 조차도 모두 여성으로 설정되어있다. 이 깔끔한 분리는 남성 캐릭터를 조력자로 확실하게 정하고, 서사를 더 좁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드라마에서 젤리를 제외한 빌런으로 보이는 캐릭터들도 전부 여성인데,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요 사건이기 때문에 드라마를 통해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부분은 원작과는 다른 설정을 가지고 있어서, 소설만을 본 독자들도 드라마에서 새로운 에피소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만을 소개하자면, 옴 잡이 혜민이다. 우리가 흔히 재수 옴 붙었다 라고 말할 때의 그 옴을 잡는 역할이다. 옴이라는 것은 잠깐은 문제없어도 오랫동안 붙어있으면 문제가 되는데, 그걸 막기 위해 혜민은 학교 곳곳에 있는 옴을 먹어서 없앤다. 은영과 같은 세상에 있으면서도 다른 가치관을 가진다. 언제라도 자신이 젤리를 볼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 된다면 그러고 싶다고 생각하는 은영과 달리, 혜민은 본인의 운명에 순응한다. 죽음과 탄생이 너무나도 반복되어 그에게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혜민과의 만남은 은영이 처음으로 불특정 다수를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한 행동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은영은 고민하고, 포기하고, 화도 내보지만, 결국은 아이의 행복을 위해 운명을 바꾸는 선택을 한다. 은영의 다정함은 곧 작가의 시선이다. 아이에게 호의와 애정을 보이는 어른의 당연한 역할은 극을 아주 따뜻한 분위기로 전환시킨다. 은영은 같은 세상을 보는 친구 한 명을 잃게 되었으나, 그게 혜민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다.



 드라마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분량이 끊긴다는 점일 것이다. 드라마는 한 화를 악 60분이 안 되는 분량에 담아내고, 시청자들이 그다음화를 누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앉은자리에서 끊김 없이 내용을 즐길 수 있는 소설과는 다르다. 궁금증을 유발하고, 캐릭터 간의 연결을 더욱 끈덕지게 엮어낸다. 에피소드 형태의 내용을 하나로 관통시키는 사건이 시청자를 계속해서 끌어당긴다.

 드라마를 보고 난 후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 원작 소설을 읽었다. 원작이 가지는 매력과 드라마가 가지는 매력이 뚜렷하게 다르다. 소설의 안은영과 홍인표가 좀 더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드라마는 둘의 외로움을 더 명백하게 보여준다. (시즌 1에서 둘의 러브라인에 아쉬움을 느꼈다면 소설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색으로 따지자면 소설은 난색, 드라마는 한색이다.

 매체를 바꾸면서 어떤 변화는 무조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책에는 없던 설정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포인트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변화는 아주 긍정적이다. 소설과 드라마의 장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고, 배우 정유미의 캐릭터 소화력이 대단하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안은영은 지금까지 정유미가 보여준 그 어떤 캐릭터와도 다르다. 눈가에 자연스럽게 진 그늘과 주름, 꼿꼿하게 마른 몸, 헝클어진 검정머리 모두 소설의 안은영이 튀어나온 듯 어울렸다. 극 내에서 욕설이 많이 쓰이는 편인데, 나는 이 점이 전혀 가벼워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그들이 정말로 내 앞에서 살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푸른 빛의 화면은 이 드라마가 정말로 현실의 한 부분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번 <보건교사 안은영>을 통해서, 사람들은 정세랑 작가의 세계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고, 앞으로 그가 보여줄 환상적인 판타지가 기대가 된다. 소설로 미리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드라마로 접한 후 작가와 책에 관심을 가진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소설보다도 재미있게 표현된 것 같은 캐릭터는 홍인표인데, 배우 남주혁이 연기한 이 캐릭터는 다양한 인터뷰에도 실렸듯, 오롯이 남주혁의 힘으로 입체감을 더한 캐릭터다. 홍인표는 멋진 사람이 아니다. 개량한복을 입고 갓을 쓴 한문교사, 턱에는 제대로 손질하지 않은 수염자국, 농구하자는 제안에 화를 내지도 못하는 사람. 인표는 본인에게 주어지는 의무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종하기를 선택했고, 사고를 통해 절게 된 다리로 세상에 더 무심한 사람이 되었다. 운동도 했었다는 그의 대사를 보면, 사고를 당하지 않은 인표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 보게 된다. 이 외로운 사람들의 만남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들에게 주어진 다정함이다.



 우리가 볼품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히어로가 되는 서사는 드문 것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스파이더맨도 그랬고, 캡틴 아메리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런 계기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세상에 일어나는 재앙들을 해결하는데 자신의 인생을 바친다. 개인보다는 대의를 중요시하는 유형이다. 그러나 이곳의 히어로는 다르다. 일상의 지지부진한 것들을 해결하는 것만 해도 진이 빠지는, 피곤한 직장인. 아이들의 보건 선생님. 세금은 그녀의 공로를 참작해 주지 못하고, 젤리 하나를 터뜨릴 때마다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악을 위해 싸우고, 구하지 못한 것들에 안타까워하며, 지난 인연들을 떠올리며 슬퍼하는 사람이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기세를 아낀다고 불을 끄고 간이 욕조에 몸을 담그는 사람. 그러나 아무리 티를 내지 않는 다고 해도, 영웅의 곁에는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다. 받은 호의를 보답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녀의 이상한 성격이 마음에 든 사람도 있고, 같은 세상을 보지는 못해도 손을 잡아주고 싶어 진 사람도 있다. 마지막 순간 서로를 찾으며 소리치는 은영과 인표를 보면 정세랑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은영만이 알 수 있었던 세계가 점차 넓어지는 과정이다. 은영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대충 입꼬리를 올린 미소가 아닌 진짜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은영이 행복하지 않아도 곁을 지켜줄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외로운 영웅이 더 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시즌 2의 안은영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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