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 이후에 한동안 바둑이 유행했던 것처럼, 요즘 미국에는 다시금 체스 열풍이 돌고 있다. 명백히 이 드라마의 영향일 것이다. 고아 소녀인 베스 하먼이 세계 최고의 체스 챔피언이 되는 이야기인 <퀸스 갬빗>. 드라마를 보기 시작할 때 나는 체스에 대한 기본적인 규칙과 기물에 대해서도 몰랐지만, 체스에 대한 상식이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다. 넷플릭스의 여성들 1편에서 소개한 안은영에게 홍인표라는 고정적인 조력자가 있었다면, 베스 하먼의 이야기에서 그의 곁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지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곁을 스쳐가거나,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다시 멀어지곤 한다. 이것이 주연 캐릭터의 서사를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퀸스 갬빗은 아주 확실한 원톱 주연의 방식으로 극을 끌어나가고 있다. 베스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는 모습을 특별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풀어낸다. 극의 완급조절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보통 성장담은 주인공의 암흑기나, 연애나 어떤 것으로 중간 부분이 루즈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순식간에 정주행 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1950~60년대의 빈티지한 색감과 의상, 분위기는 극의 아름다움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모던 체스 오프닝
어린 베스 하먼은 보육원의 지하실에서 관리인 샤이벌이 하는 게임을 보고 관심을 가진다. 샤이벌은 처음에 베스에게 체스를 가르쳐 주지 않으려 하지만, 며칠 후 베스는 이름도 모르는 이 게임의 룰을 오로지 본인의 머릿속으로 이해한다. 샤이벌은 어두운 지하실에서 이 소녀의 빛나는 천재성을 보게 된다. 그때부터 시작된 합창 시간의 일탈은 언제나 체스와 함께였다. 체스의 규칙과 매너를 배워가면서 베스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샤이벌이 베스에게 처음으로 패배했을 때, 이미 베스의 실력은 또래의 것이 아니었다.
샤이벌은 처음으로 승리한 베스에게 [모던 체스 오프닝]이라는 책을 선물한다. 작품의 제목인 퀸스 갬빗도 체스의 오프닝 방식 중 하나인데, 이를 통해서 작중에서 오프닝이 가지는 의미가 상당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체스는 돌을 추가로 올려놓는 바둑과는 달리, 정해진 기물 안에서 점점 없애며 진행하는 게임이다. 따라서 기물이 제일 많은 초반의 포지션 선정이 중요한데, 중심부를 차지하기 위해 가장 가치가 낮은 기물인 폰(pawn)을 희생하면서 시작하는 오프닝이 바로 퀸스 갬빗이다. 이 오프닝은 초반부터 나오지는 않고, 극을 보다 보면 예상할 수 있듯 그녀의 최종 승부에서 등장하는 오프닝 방식이다.
베스의 실력은 샤이벌을 통해 옆 고등학교 체스 클럽 담당 선생에게 알려지고, 베스는 처음으로 지하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체스를 두게 된다. 체스는 가진 것이라곤 아주 작은 사물함만큼의 공간이 다였던 베스에게 최초의 욕망으로 자리 잡는다. 몇 년 후 베스는 한 가정에 입양된다. 그다지 유복한 가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베스의 첫 옷은 마네킹에 걸린 옷이 아닌 세일 존의 투박한 것들이었다. 베스는 그 점을 이해하지만, 본인이 유일하게 열망하는 체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집의 사정이 어려워져 돈이 필요해졌고, 베스는 체스 상금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체스 경기에도 참가비가 있는 줄은 몰랐다. 고민하던 베스는 샤이벌 씨에게 편지를 쓴다. 두배로 돌려줄 것을 약속하며 참가비를 부탁한다. 샤이벌 씨는 어떤 말 없이 베스에게 돈을 보내주었고, 그 길로 베스의 체스 인생이 다시 시작된다. 첫 번째 상금으로 베스는 마네킹에 걸린 옷을 산다.
초록색 알약과 엄마
챔피언을 꺾으며 고공 승진하는 베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쾌감을 준다. 베스와 엄마는 체스 경기를 위한 각국의 여행을 다니며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엄마는 베스와 체스의 세상을 공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베스는 여전히 고독한 싸움을 이어간다. 더 큰 판에서 도전하며, 베스는 패배하게 된다. 베스는 점차 의심과 불안이 심해진다. 본인이 생각하지 못한 수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확실한 승리를 원한다. 어떻게 보면 베스의 모습은 승리에 중독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초록색 알약이 이 중독을 아주 단적으로 묘사한다. 베스가 보육원에 있을 때부터 초록색 알약을 복용해 왔는데, 이것은 신경안정제로 당시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산만하지 않게 관리하기 위해 주던 것이다. 베스는 이미 약에 중독된 상태였고, 입양된 후 엄마의 찬장에서 같은 약을 발견하게 된다. 이 초록색 알약에 대한 베스의 욕구는 승리에 대한 욕구로 귀결된다. 베스는 언제나 약을 복용하고 나서 게임에서 승리했고, 약이 떨어질수록 불안해하며, 자신의 실력을 의심한다. 실력이 약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에도 의지하는 걸 볼 수 있다. 극 내에서 베스가 약물을 복용하면, 언제나 천장에 체스판이 그려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우리가 베스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장치면서도, 베스가 약물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한다는 걸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베스가 경기를 진행할 때마다 바뀌는 아름다운 의상은 초록색 알약과 함께 베스가 가지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작중에서 이것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건 베스를 정말 잘 표현하는 설정 중 하나다. 가진 것이 없던 소녀가 점차 본인의 손아귀에 무언가를 담아내는 과정으로,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베스의 인생인 것이다. 같은 약을 먹는 엄마는 마찬가지로 원하는 것이 뚜렷한 사람이다. 남편이 떠난 후 딸과 함께하게 된 그는 조금 더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원래 몸이 안 좋았던 엄마는 베스의 경기 중 세상을 떠나고, 이제 초록색 알약의 세상에서 베스는 다시 혼자다. 알약을 버리고 일어설 때다.
폰에서, 퀸으로
베스의 최종 승부, 드디어 우리가 퀸스 갬빗을 볼 차례다. 베스는 러시아의 보르고프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다. 그는 이미 이 러시아 남자에게 패배했던 이력이 있다. 그동안 베스는 자신의 능력에 기대어 승부를 펼쳐왔다. 여러 기사와 중계진들이 묘사하듯, 베스는 아주 공격적인 초반부의 기세를 통해 승리를 잡아내고, 피하기보다는 맞서는 성향이다. 이렇듯 경기에서도, 인생에서도 스스로 나아가던 베스는 끝으로 향할수록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는다. 베스가 그걸 처음부터 원했던 것은 아니다. 베스는 그들의 손길이 자신에게 도움을 줄 거라는 기대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 대결 앞에서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료가 된다. 극 내에서 러시아의 체스 기사들의 팀워크를 계속 강조하면서 베스가 지금까지처럼 홀로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베스가 지난 시간 동안 꺾어온 많은 친구들이 경기를 함께 분석해주는 장면은 사뭇 감동적이다. 체스의 싸움은 퀸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이 계속될수록 낮은 가치였던 기물은 큰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껴오던 것을 과감히 버려야 할 때도 있다. 베스의 오랜 친구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고아원에서 만난 그의 소꿉친구는 보육원에서 내내 베스의 이야기를 했다고 말한다. 세상을 떠난 샤이벌 씨의 지하실을 다시 찾은 베스는 한 면을 가득 채운 자신의 기사와 오래전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베스의 시작이었던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베스 혼자의 경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치열한 경기가 끝을 달려가면서 보르고프는 무승부를 제안한다. 하지만 해설자가 언급하듯이, 베스는 승리를 좋아한다. 지금까지처럼, 언제까지라도. 약물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체스보드가 회색 건물의 천장에 거대하게 자리 잡는다. 우리는 이 순간부터 베스의 승리를 예감한다. 베스는 드디어 스스로 가두어놓았던 많은 것들에게서 해방된다. 베스의 폰이 체스보드 끝에 다다라 퀸이 되면서* 경기는 확실한 승세를 보이며 마침표를 찍는다. 보잘것없는 폰이 결국에는 퀸이 된 것이다.
[체스의 규칙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어지는 포인트 중 하나다. 드라마를 모두 본 후 퀸스 갬빗의 마지막 경기를 해석해주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나서, 이 작품이 정말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 가장 낮은 가치인 폰(pawn)이 전진하다 체스 보드의 반대편 끝에 위치하면 다른 가치의 기물로 승진(promotion)한다. 주로 가장 높은 가치인 퀸(queen)으로 바꾼다.]
이 마지막 승부는 극의 엔딩인 만큼 여러 가지를 담아내려 노력한 듯하다. 아쉬운 점도 있고, 그럼에도 좋았던 면도 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당대 체스 사회에는 여성 기사가 드물었기 때문에, 여성 체스 기사가 주연인 이 드라마에서 마지막 조력자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모두 남성이었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기도 하다. 베스와 체스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은 전부 남성이다. 공식적인 첫 경기를 함께한 여성 기사 외에는. 그 외에 베스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역 여성들은 전부 체스 바깥에 있다. 유년시절을 함께한 소꿉친구의 역할도 사실상 미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장애물을 넘는데 혼자일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는 아주 강렬하다. 퀸과 킹을 중심으로 선 체스 기물처럼, 우리는 모든 걸 혼자서 해내지 못한다.
좋았던 점은 베스의 인생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극 중에서 베스는 본인이 실력이 아닌 여성으로서 주목받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다. 고아였던 베스는 사회의 고정적인 가치관을 전혀 습득하지 못한 채 세상에 노출되게 되는데, 이 때문에 베스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선이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또 여성이라고 해서 불필요한 불행에 노출되지도 않는다. 베스는 본인이 섹스하고 싶은 상대를 선택할 수 있고, 사랑과 애정 때문에 체스에 회의감을 느끼고 방황하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예상하게 되는 폭력적인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 베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욕망과 귀결된다. 기분 좋은 약을 먹고 싶은, 이기고 싶은, 예쁜 옷을 입고 싶은, 술과 담배를 즐기고 싶은 그런 것들. 베스에게 체스뿐이기 때문에, 극을 보는 우리도 어떠한 불편함 없이 체스와 베스 하먼, 이 두 객체에 확실하게 집중하게 된다.
승리 후 베스는 수많은 기자들과 명예로운 인터뷰를 뒤로하고 러시아의 거리를 걷는다. 이곳의 광장에서는 노인들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여러 개의 체스판 사이에 앉아 체스를 즐긴다. 체스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베스는 다시 한번 경기를 시작한다. 중반부에 훈련을 도와주려는 친구에게 상대가 안된다며 날카롭게 응수했던 것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베스는 정상에 섰지만 체스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