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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May 09. 2024

오월 단상

가장 완벽한 일기

눈 뜨면 공기 중 먼지 농도를 체크하는 게 어느덧 일상이다. 미세먼지 농도 4, 초미세 1. 대기질에 촉을 세우살아온 이래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수치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여기가 한국 맞나, 하는 것이었다.



대기를 부유하던 수만의 미립자가 여러 날 내린 비로  말끔히 씻겨 내려간  모양이었다. 그 위에 내리쬔 오월의 햇살은 사심없이  투명했다. 애정을 듬뿍 담은 애인의 미소처럼 따사롭기까지 했.


자연은  날씨작은 변화에도 울다 웃다 움츠러들었다 활개를 쳤다 하는 한낱 미약한 피조물에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모든 은총을 베풀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어제는 일 년 열두 달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완벽한 일기였다.



벌써 아까시가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나. 우리 아파트 뒤안길이 꿀의 향내로 충만했다. 경쾌한 음악에 절로 춤사위가 나듯 내딛는 발걸음마다 가볍고 활기가 다.



걷고 걸어도 곤하지 않은 . 문득 박경리 선생의 <토지>의 한 장면이 떠올랐. 유년의 옷벗고 어른으로 향해가는 길상이 봄의 기운에 취해 공중을 부유하듯 내달리던, 읽는 이의 가슴을 부풀게 했던 바로 그 장면이. 별안간 그날의 길상의 심정이 깨달아지면서 마음이 자꾸만 간지러워지는 것이었다.



봄비에 말갛게 된 오월의 대기처럼 내 마음도 그랬다. 차곡이 쌓여 피로와 우울의 그림자가 단박에 기며 새 살이 돋는 실감이 났다.



무엇이든 명목 삼고 핑계 삼아 종일 걷고 또 걸었다. 걷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벽한 오월의 어느 봄날을 기리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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