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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Nov 29. 2024

미쿡(cook) 주부로 삽니다

주방 살림은 '길들임'이다. 크고 작은 냄비가, 하나 둘 찬장에 들인 식기가, 작은 찻잔 하나도 자꾸 만지다 보면 길이 든다. 아무리 볼품없는 감자칼 하나라도 손에 익으면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 정감 넘치는 주방의 세계다. 그렇게 시간과 공을 들인 살림살이들이 막역한 벗이 되어 나와 함께 살림을 산다.



처음 미국집 주방에 섰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기름칠 범벅에 황량하기 그지없는 주방에서 작은 다짐을 누던 그날을. 겨우 1년 쓰다 버리고 갈 살림, 적당히 살다 가자고. 네 식구 세 끼니 간소하게 차려먹다가 미련 없이 자리를 뜨면 그만일 거라고. 이전 세입자로부터 통째로 물려받은 주방 세간은 애초 나의 의지나 취향과 상관없는 것들이었고, 그것들에 크게 정을 붙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나에겐 돌아갈 집이 있었다. 정성껏 길들여진 내 모든 살림살이가 한국에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것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이제나저제나 집 떠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귀인처럼 나타난 쿨가이(https://brunch.co.kr/@sirjeon82/223)가 나를 대신해 그것들을 잘 맡아주고 계시겠지. 나는 종종 나의 살림을 떠올리며 애틋한 마음이 되곤 했다.


 



그러나 1년 해외살이란 적당히 한두 끼 라면으로 배를 채우다 돌아가면 되는 그런 가벼운 여행이 아니었다. 미국 생활은 요리 그 자체였다. 예상을 못한 바 아니지만 현실은 그 이상이었다. 외식 물가는 비쌌고, 큰맘 먹고 식당에 간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기 힘들었다. 새 환경에 어렵사리 적응해 가는 아이들은 '갑자기 뭐가 당긴다' 하며 수시로 간식을 찾았다. 그리고 또 하나, 도시락을 빼놓고 무얼 말할까. 매일 아침 등교하는 두 아이 손에 점심보따리를 들려 보내는 일이야말로 이곳에서 부모 노릇을 하는 내게 주어진 가장 중차대한 임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시시로 불 앞에 설 때마다 맘에 걸리는 게 많았다. 칼자국 사이사이 곰팡이가 핀 도마와 코팅 벗겨진 프라이팬. 데일리 식기로 여겼던 코렐 밥공기, 국공기는 생각보다 쓸 일이 적었다. 밥과 국의 비중이 준 탓이었다. 국 대신 수프가, 나물 대신 샐러드가 자주 밥상에 올랐고, 빵도 친숙한 메뉴가 됐다. 한 그릇 음식을 자주 짓게 되는가 하면 생선, 고기를 굽는 일이 늘었다. 메뉴의 다변화와 함께 다양한 쓰임의 접시와 볼이 절실해졌다.  



한 달을 살건 일 년을 머물건 이 집 주방에 필요한 물건은 똑같이 100가지라는 결론을 얻었다. 지금 소비를 참고 견디어낸 어떤 물건은 어쩌면 출국을 코앞에 두고 사게 될지 모른다는 현실직시. 나는 망설임을 과감히 벗어던졌다. 중고샵(Thrift store)과 타겟(Target)을 수시로 찾았고 아마존을 들락거리며 주방의 필요를 채워나갔다.



소비에는 탄력이 붙게 마련이다. 휘핑기와 각종 제빵도구를 들였다. 성능 좋은 가스 오븐을 그저 놀릴 수가 없어서였다. 와플메이커는 간식을 만드는데 요긴할 것 같았다. 오렌지가 맛있는 나라에서 최고의 주스를 내려마시겠다는 건 사치가 아니지. 누가 들어도 타당한 논리로 쥬서기를 샀다. 매일 차를 내고 싶어지는 어여쁜 찻잔세트도 기어코 사고 말았다. 주방은 금세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졌다.






주방을 정비하고 보니 어차피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랑이었다. 이미 미국은 한식의 성지다. 내가 거주하는 NC주의 대표적 한인마트(H마트)만 해도 한국인보다 외국인 고객의 비율이 높다. 고국 음식이 그리워 홈씩을 앓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마음만 먹으면 푸짐하게 한상을 차려낼 수 있다. 웃돈을 얹어가며 직구하기가 망설여지던 각종 향신료와 소스가 쉽게 눈에 띈다. 마트마다 개성 있는 식재료를 선보이고, 유튜버들은 ‘어디에 가니 뭐가 있더라’, ‘무얼 사다 이렇게 해 먹어 보시라’ 소개하기 바쁘다. 순전한 호기심과 함께 알아가고픈 식재료가, 새롭게 도전하고픈 요리가 늘어간다.



어쩌면 나는 사랑하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시작조차 못 하는 바보처럼 굴었던 걸까. 크게 정들면 두고 떠나기 어려울까 봐. 이제 와 길들임에 필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진심과 열정이라는 사실에 눈을 뜬다. 짧지만 뜨거운 사랑을 직감한다. 좀체 마음을 둘 수 없었던 나의 주방이 음식에 대한 진심과 조리의 열기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본다.



나는 오늘도 미쿡(cook) 주부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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