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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17. 2022

내 청춘의 맛, 광화문 미진

메밀국수 / 간 무와 대파를 함께 넣어먹는 어른의 맛

유독 여름이면 면이 당긴다. 그리고 이내 광화문 미진의 메밀국수 생각이 났다. 매콤한 비빔국수, 고소한 콩국수, 감칠맛의 냉짬뽕을 좋아하지만 메밀국수만은 미진의 것으로 먹고 싶어 다른 식당의 메밀국수는 먹지 않았다.


광화문 미진에 처음 간 게 언제더라. 십수 년은 더 지난 일이다. 기자였던 내게 광화문은 일터였다. 한국프레스센터가 있고 주요 신문사가 모여있으며 기자회견이나 시위가 자주 열리는 곳. 일주일에 한두 번은 취재하러 와야 하는 곳이 광화문이었다.


그날은 무더위가 시작되려는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을 거다. 보통 광화문 근처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은 10시. 기자회견이 끝나고 기사를 송고한 뒤 선배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광화문 미진에 가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넓은 가게엔 이미 남은 자리가 거의 없고 다들 메밀국수를 먹고 있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메밀국수를 주문했다.


장국이 담겨있는 주전자에 맺힌 이슬이 유독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 이후 어디에서도 이렇게 후하게 주전자 채로 장국을 주는 집은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식탁 한쪽에는 그릇 가득 담긴 대파, 간 무, 조미김이 있었다.


선배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그릇에 주전자의 장국을 따르고 맘 가는 대로 대파, 간 무, 조미김을 넣은 뒤 탱글한 메밀국수를 담가 먹었다. 서울살이가 익숙지 않던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이 하는 대로 메밀국수를 후루룩 마시듯 해치웠다. 참 맛이 좋았다.


그날 이후 나는 광화문에서 취재가 있는 날이면 종종 미진에 들렀다. 한바탕 열심히 일하고 먹는 일종의 일밥이었다.


작은 서울의 원룸을 정리하고 결혼해서 이사를 한 뒤에도 여름이면 종종 광화문 미진의 메밀국수 생각이 났다. 아이가 생기고 난 뒤 몇 년간은 광화문 미진에 전혀 가보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 광화문에 갔다 오려면 한나절이 꼬박 걸린다. 그래서 아예 시도도 하지 못했다.


2018년 한국에서 처음 미쉐린 가이드가 선정될 때 그 리스트를 찾아보다 반가운 이름 광화문 미진을 발견했다.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는 빕 그루망 식당에 광화문 미진이 이름을 올린 것이다.


미진 메밀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뿐이겠냐마는 그래도 내가 알고 지내던 옛 친구가 실력을 인정받고 유명해진 기분이랄까?(원래도 유명한 식당이지만)


그러다 작년에 오픈한 갤러리아 광교 식당층에서 광화문 미진을 발견했다. 옛 친구를 약속도 없이 동네에서 마주친 기분이었다. 광화문에서나 먹을 수 있던 미진 메밀국수를 동네에서 먹게 되다니!


나는 혼자 광화문 미진 광교점에 들어가 메밀국수를 시켰다. 시원한 장국이 든 주전자가 나왔다. 너 아직 그대로구나! 변하지 않은 친구를 만난 기분이 이럴까? 테이블 옆으로 대파와 간 무, 조미김도 광화문에서와 같았다. 혼자 야무지게 메밀국수를 말아먹고 나왔다. 면까지 추가해서.


광화문에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일을 하는 중에 누군가와 함께였고, 지금은 혼자라는 것. 광화문 미진이 광화문에서 있어야지 왜 광교까지 와서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 건지.


어쩌면 내게 미진의 메밀국수는 여름이면 생각나는 비빔국수, 콩국수, 냉짬뽕과 같은 여름의 메뉴가 아니라 스물넷 열정 가득했던 나의 광화문에서의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음식인지 모르겠다. 그냥 여름의 맛이 아니라, 청춘의 맛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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