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어린 Apr 29. 2023

목련을 닮은 복희에게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10) - 산달의 경칩 편지

복희! 오늘은 제 상태가 별로 좋지 않네요. 문장이 보기에 깔끔하거나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어요. 복희가 요절한다면 사인은 과로일 거라고 했죠. 그 문장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과 동지애를 동시에 느꼈어요. 전원이 나가듯 잠에 든다니요.. 저도 분에 맞지 않을 정도로 일복이 넘치거든요. 저는 왜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일을 떠안고서 괴로워하는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가 없어요. 조금씩 일 사이에 틈을 만드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가야 하죠.


저번 편지에서도 말했다시피 저는 늘 편지를 쓰는 날엔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규칙이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 규칙을 어겨버렸어요. 하루 종일 신경 써야 하는 업무들과 공부, 모임 참여를 다 끝마치고서야 겨우 복희에게 줄 문장들을 고르고 있어요.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이번만은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한다는 점이 저를 슬프게 한답니다. 아, 그래서 이번 편지에는 봄볕을 담지 못할 것 같아요. 이틀 동안 집 안에만 있었거든요. 씻긴 씻었는데 어떤 냄새가 담길지 두렵습니다.


돌이켜보면 사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늘 그래왔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너무 많은 동아리에 참여하다가 동아리 축제 때 맡은 역할을 소홀히 해서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었어요. 2학년 때는 학생회를 하면서 시험을 뒷전으로 하기도 했고요. 엄마 아빠와 선생님들은 늘 제게 “어느 하나에 차분히 집중할 수 있는 산달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는 했지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참 고집이 센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어요. 감당하기 힘들 때가 되면 그제서야 일을 줄여나가기 시작하다가 금세 또 다른 일들을 찾아서 힘들어하는 일을 반복해요. 그런데 제가 체력은 또 좋아서 결국 그 많은 일들을 다 해내긴 해요. 그래서 습관이 바뀌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이 습관을 고쳐야겠다고 마음 먹었답니다. 무리하면서 몸이 상하는 것은 둘째치고, 하고싶었던 일들을 즐기면서 할 수가 없더라구요. 나름의 필요를 느끼면서 시작한 일들인데, 어느덧 임무를 수행하는 인공지능 기계장치처럼 일하고 있는 저를 발견해요. 그리고 가장 절박한 이유가 있는데요.  무리해서 일을 하는 것이 함께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처럼 무리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꼴이 되기도 하니까요. 친구들에게 진심이 담긴 사려깊은 말들이 아닌 효율적이고 차가운 말들을 건네는 저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제가 써내려가고 있는 말들도 복희에게 고백이 아닌 일방적인 한탄이 될까 조심스러워요.


저는 제 삶의 중심이 바깥에 있는 사람이었어요. 늘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갈구하고, 그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해왔거든요. 저는 어디서나 늘 착한 아이였고, 저를 착하다고 해주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했어요. 착한데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아이! 그런 모습이 되기 위해서 저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어요. 늘 많은 일들을 동시에 해내고 하루라도 더 빨리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항상 이런 의문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해내는데, 왜 나는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지? 제 안의 공허함은 늘 배고프다고 소리쳤지만요.


결국 그런 마음이 해소되지 못한 저는 아직까지도 많은 일들을 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어요. 계속해서 더 많은 일들을 하기를 제 안의 어린아이가 바랬거든요. 이런 제 모습이 지금의 세상과 닮아 있다고도 느껴요.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생명을 갈아넣어 성장하기를 그칠줄 모르는 모습 말이에요. 누군가는 먹고 살려면 경제성장이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그게 어떤 희생을 대가로 치르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없죠. 우리의 공동체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왜 상상하지 못하냐고 다그쳤는데, 정작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바보가 바로 여기 있더라고요.


하지만 이게 모두 하나의 과정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예전에는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현실에 안주하고 적응하는 게으른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오히려 그 마음은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더라구요. 세상은 잘난 어느 한 천재가 바꾸는 게 아니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여럿’이 바꾸니까요. 외투를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살이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건 군대가 아니라 나팔이니까요. 그 마음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후운동을 할 수 있겠어요?


복희, 제가 이번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아마 모를거에요. 복희가 하는 말들 하나하나가 제게 나무의 눈처럼 느껴졌거든요. 제게 앞으로 생겨날 나무의 눈들이 아주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의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리저리 떠들고 있으니까요. 마치 속내를 들킨 듯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어요. 복희의 문장들은 제 ‘처음’을 되새기게 만들어주었거든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랑’으로 모두를 품어야겠다는 ‘첫 마음’ 말이에요.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에요. 지치고 때묻은 저의 온 마음들이 씻겨져요.


맞아요. 저는 누가 어떤 말들을 하든, 그게 최소한 그 사람에게는 진실일 거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어떤 이의 의견도 귀하게 들으려고 했고, 그들의 진심을 믿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여름방학에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읽었답니다. 그때만큼 세상에 대해 실망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책에는 고기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끔찍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거든요. 저는 이전에는 여태껏 한 번도 내가 먹는 고기들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없었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선한 마음만 가지고는 이 죽음을 멈출 수 없겠구나.”


사랑을 말하며 죽음을 외면하던 이들이 참 미웠어요. 그들이 말하는 사랑만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업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제가 외치는 ‘사랑’에 누락된 존재들이 없는지 강박적으로 묻기 시작했어요. 동물의 죽음에서 시작된 부정의에 대한 감각을 이내 곧 여성들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고, 장애인들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어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여성운동과 “모든 해방은 연결되어 있다”는 동물해방운동,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자는 없다. 단지 듣지 않으려고 해서 들리지 않게 된 존재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장애운동의 구호들이 다르지 않게 느껴졌어요. 그러던 차에 만난 기후운동은 그 모든 존재들이 앞으로 나서서 스스로 정치적인 존재가 되기를 말하는 운동이었어요. 모두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운동이 기후운동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렇게 어쩌다보니까 저는 기후운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봐요, 복희. 하나만 해도 힘들어죽겠는데,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아우르려는 시도를 하니 얼마나 가랑이가 찢어졌겠어요. 가장 괴로운 것은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수많은 죽음과 부조리와 슬픔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거였어요. 모든 곳에 다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감당해야만 했어요. 복희, 그건 하나하나의 죽음들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었어요. 하나하나의 삶들을 가슴에 새기는 일이었어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학살을 방관하는 일이었어요. 여전히 모른 채하고 부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요.


하지만 복희, 예전에는 그들이 참 미웠는데요. 이제는 마냥 그렇지만은 않아요.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맥락과 아픔들을 이제는 상상해보려고 해요. 심지어 학살을 가장 앞서서 자행하는 사람들도요. 그리고 여전히 많은 이들은 무한 번의 선택을 앞두고 있는걸요. 그저 그들의 선택을 함께 할 수 있는 제가 되길 바래요. “그들을 바꾸기 보다는 그들의 세계를 바꾸겠다는” 다짐을 되새겨보아요. 그리고 그 방법은 복희가 말한 것처럼 그들을 사랑해버리는 것일 거에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네가 너라서 좋아”라고 말하면서 매일 천천히, 하나씩, 조금씩 말이에요.


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이제 자러가야겠어요. 저부터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겠어요. 저를 사랑하는 일이 곧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부터요.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저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아빠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요. 내일은 바깥 공기도 햇살도 좀 쐬어야겠어요. 지리산엔 꽃들이 피었나요? 여기엔 벌써 목련이 활짝 피었어요! 어떤 환경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식물들이 참 경이롭고 존경스러워요.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느껴요. 복희, 우리도 그렇게 피어난 꽃들이겠죠?


늦잠 자러 간 산달이


작가의 이전글 나무의 눈동자를 닮은 산달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