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보내는 펜팔(9) - 덕복희의 경칩 편지
산달! 제가 만약 요절한다면 사인은 과로일 거예요. 산달의 고질적인 습관이 미루기라면, 저는 절대 미루지 못하는 강박이 있답니다. 제가 눈 뜨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 할 일 리스트’를 적는 거예요. 아니 사실 아침까지도 미루지 못해 전날 밤에 적어두고 자요. 이런 저를 보고 소름끼쳐하는 친구들의 반응이 제법 익숙해요. 새벽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을 떨다가, 초저녁이 되면 충전할 때를 놓친 핸드폰처럼 푱 하고 전원이 나가듯 잠이 듭니다.
산달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은, 성질 급한 저에게 퍽 좋은 처방처럼 느껴져요. 제가 조금 더 느긋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주어요. 저는 산달이 하루를 통째로 편지를 쓰며 보내는 사람이라서 좋아요. 글을 날쌔게 쓰는 재능을 가진 사람과 편지를 나누고 싶었다면 쇼미더머니에 가서 즉흥랩을 듣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히히. 그러니 새끼 손가락을 걸고 하는 약속은 ‘늦지 않기’보다는 ‘느리고 빠른 서로를 수용하기’로 해요!
산달의 편지를 받은 날도 새벽에 눈을 떴어요. 무등산 국립공원으로 집회를 가는 동료들에게 응원을 보내려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잠시 미루었는데요. 그 틈에 메일함을 보니 고작 한 시간쯤 전에 산달의 편지가 도착해있는 거예요! 답신을 해주느라 늦은 잠을 청했을 산달이 고맙고 안쓰러우면서도, 또 겨우 몇 시간 뒤에 무등산으로 간다니 한번 더 고맙고 안쓰러웠어요. 저는 불가피한 일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는데 갔더라면 반가운 얼굴을 만났겠다 싶어 아쉬움도 크고요. 잘 다녀왔나요? 그리고 무탈히 돌아갔나요? 집에 가서 미뤄둔 잠을 푹 잤기를 바라요.
저도 2월 회동을 오랫동안 곱씹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즐거웠거든요. 어설프게 준비한 자리였는데도 다들 따뜻하게 웃어주고, 뒷정리도 손을 보태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동네방네 남산을 뛰다니며 사람들에게 한 입씩 맛보게 해주는 산달을 상상해보니 웃음이 나네요. 전 산달을 첫눈에 딱 알아봤답니다! 꽃무늬 양말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도 말예요. 산달의 우표 그림과 꼭 닮은 사람은 한명 뿐이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산달과는 어째 눈을 마주치기가 쑥쓰럽더라고요. 그날 수상하게 자꾸 관자놀이로 산달을 흘겨보던 사람을 목격했다면 그게 저라고 여겨주세요.
산달! 새삼스럽지만, 제가 산달의 편지에 얼마나 감동하는지 말했던가요? 산달의 편지를 읽으면 꼭 산달의 머릿속을 산책한 듯해요. 사랑과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한 산달의 사유들이 들풀처럼 펼쳐져요. 입을 가로막힌 생명들이 충분히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기다리고, 세벳돈 봉투에 적힌 마음에 눈물짓고, 왜 저런 옷을 입는지 이해하려고 ‘우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는, 추하고 날 것의 존재들이 세상을 바꿨다고 말하는 그 문장에서 저는 ‘그름’을 ‘미움’으로 대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느껴요. 이건 제가 아침 산책마다 숲에서 배우는 마음이거든요.
특히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세심한 흔적들은 꼭 정오의 햇살 같아요. 산달에게 존경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제가 꼭 지난 편지에서 거짓말을 부려놓은 양 부끄럽기도 하고요. 한편 산달의 편지엔 꼭 산달의 아픔이 함께 있어서 뭉클해요. ‘오히려 내가 싸우고자 하는 것들이 내 안에 있을 때 그것과 가장 잘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돌에 새긴 것처럼 단단하게 느껴져요. 고민을 거듭할 적마다 단단해졌을 거예요. “그래서? 그 괴로움을 넘어서 넌 어쩜 누군가의 아픔에 존경을 선물할 줄 아는 사람이 됐어?”라는 되물음이 남아요. 저도 그 선물을 돌려주고 싶어서 그래요. 아프고 무가치한 존재들이 세상을 바꾸는 신화가 누군들 궁금하지 않겠어요?
산달이 매일 보는 책은 어떤 책인가요? 어떤 기획을 주로 하나요? 마음을 표현하는 글쓰기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산달이 가장 좋아하는 하루의 모습은 어떤가요? 어떤 날씨와 만남과 음식과 함께 할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요? 전 산달이 왜 기후운동을 하게됐는지도 무척 궁금해요. 산달은 아주 어릴적부터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는지, 아니면 벼락을 맞은 듯이 산달의 세상이 바뀌었던 건지도요. 이번 경칩의 주제는 ‘내가 잃은 초심’이에요. 산달이 기억하는 ‘처음’을 이야기 하다보면, 다른 질문에도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전 잃은 초심이 많은데 그게 상실로 느껴지는 게 없더라고요. 제가 볼 땐 또 다른 무언가로 초심이 채워진 느낌이에요. ‘잃은 초심’이 아니라 ‘변태한 초심’이랄까요! 제가 기억하는 처음의 저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눈을 갖고 싶어했어요. 핵발전소는 반대하고 싶은데 왜인지 잘 설명하고 싶고, 속치마를 안입고 외출했다고 밥상을 뒤엎던 아빠한테 한 마디 쏘아주고 싶고, 시골로 냅다 향한 게 왜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게 아닌지 해명하고 싶었거든요. 제 행동이 ‘옳지 않다’면 냉큼 바꾸고 싶었고요.
그런데 지금 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눈을 버리려고 애써요. 물론 내 안에 ‘저건 아니지!’하는 습이 올라올 때가 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스스로 납득해요. ‘저것도 맞을지도 몰라’하고요. 하루는 제가 좋아하던 한 스님과 논둑길을 걸었어요. 스님은 띠풀을 손으로 훔치며 제게 ‘진리가 무엇인지 아시나요?’하고 물었어요. 저는 스님을 따라서 풀을 만지작대다가 흐리멍텅한 눈으로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했는데요. 스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죠.’라고 하셨어요.
자연엔 정말이지 맞고 틀린 게 없어요. 우리 모꼬지 때 함께 나무를 만났잖아요. 나무는 마주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는데, 둘 중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더라고요. 딱따구리는 암수가 육아를 함께 해요. 집도 같이 짓고 알도 같이 품어요. 그런데 동고비는 암수가 역할이 정확히 나뉘죠. 여자가 집짓고 알을 품는 동안, 남자는 보초를 서고 먹이를 구해다주어요. 딱따구리나 동고비 중 어느 한 쪽이 옳은 방식이라고 할 수 없어요. 각자의 방식이 있고, 방식에 따른 장단점이 있겠죠.
산달, 저는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대부분 아빠를 향한 것이었는데, 나중엔 아빠와 닮은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남자들은 죄다 미워했어요. 당시는 누가 툭 치면 꽉 깨물 준비를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러다 머리를 싹둑 잘랐는데 제가 너무 아빠를 닮은 거예요. 긴머리일 때는 몰랐는데 짧은 머리를 하니 아빠를 빼다 박아논 모양새였죠. 그러더니 공중 화장실에 가면 ‘여기 남자 화장실 아니에요!’하는 소릴 듣지 않나, 동네 어르신이나 아이들이 와서 ‘여자에요 남자에요?’하고 묻기 시작했어요.
아빠를 본격적으로 미워하기 시작하자, 제가 아빠와 똑 닮아져버렸다니 얄궂은 아이러니죠. 남자로 산다는 건 어떤 건가요? 남들이 저를 남자로 대하면 남자로 살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 면에서 전 남자가 되기도 하더군요. 산달은 ‘한국에서 지정성별 남성으로 태어나 자란 저는 늘 제가 ‘속해 있는’ 집단의 해로움을 물려받았을 거에요. 괴롭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죠.’라고 말했잖아요. 저는 여성으로 태어난 제 안에도 그 해로움이 있음을 분명히 느껴요. 원래 여성과 남성이 칼로 자른 듯 나뉘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건 해로움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옳고 그른 건 없으니까요.
나무의 눈을 본 적이 있나요? 전 나무의 형형한 눈동자가 마냥 신기했는데요. 이게 알고보니 나무가 스스로 아픈 자리를 치료한 흔적이었다고 해요. 아픔을 치유하고 나면 그곳에서 새로운 눈이 생기는 거죠. 산달의 편지가 제게 감동인 것은 아마 이런 이유일 거예요. ‘그름’을 ‘미움’으로 대하지 않듯이, 자신 안의 ‘해로움’ 앞에서 산달이 오래 서성인 흔적이 제겐 나무의 눈동자만큼 반짝거려요. 그 눈동자를 바로보고 ‘그건 해로움만은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어요. 누군가 제게 ‘옳고 그름이 없다니! 그건 분명히 존재해’라고 주장한다면, 그 말에조차 고개를 끄덕이길 바라요. ‘네 말이 맞아’라고 말하고 모두를 사랑해버리길 바라고요.
산달! 몸이 찌뿌둥할 땐 햇살을 좀 쐬면 어떤가요? 햇살의 영역은 언제나 옳고 그름을 넘어서니까요. 햇살을 오래 쐰 고양이의 몸에선 햇살 냄새가 나더군요. 다음 편지엔 햇살 냄새가 나는 산달의 하루를 담아줘도 근사하겠어요. 아, 앞서 나열한 질문 폭탄도 잊지 마시고요! 사실 어떤 내용이든 신이 날 거예요. 그럼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