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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Dec 12. 2019

그 토끼들이 살던 세상

“뭐야? 선물이라도 사 온 거야? 웬 쇼핑백 사이즈가 크다?”


“선물? 생각 못한 걸 받은 건 맞는데...”


“이리 줘 봐…. 이 지저분한 담요는 뭐냐? 토끼? 두 마리나? 너 다시 토끼 키우기로 한 거야? 근데 얘들은 이미 다 큰 거 같네?”


“아니야.”


“아니라고? 얘들 다 큰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내가 다시 키우는 게 아니라고. 전에 키우던 애들. 네가 봤던 토끼들이라고.”


“뭐? 엄청 오래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토끼 얘기가 전혀 없었네? 처음에 블로그에 사진도 올리고 그랬잖아?


“그래. 나는 왜 처음에는 엄청 호들갑 떨다가 일을 망치는 걸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얘들은 누가 돌봐주고 있었는데?”


“나 진짜 벌 받아야 돼. 그냥 우리 집 베란다에서 알아서 크고 있었어. 아무 소리도 안 내고 조용하게….”


“뭐라고? 얘들이 뭐 사료라도 벌어먹고 살았대? 방치도 학대라고. 근데 그게 가능한 거야? 뭐야. 농담이지? 아무리 너네 집이 넓다고 한다 쳐도….”


“난 좀 심각한데. 너 우리 집에 온 지 몇 년 됐지 아마?”


“그래. 언젠가부터 이상하게 집에 못 오게 하는 것 같더라니. 뭔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이네. 왜 말 안 했어?”


“실은 이것저것 포기하고 사니까 청소나 빨래도 하나 둘 손 안대기 시작했어. 그게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더라고. 도저히 청소해서 바닥을 드러낼 용기가 안 나는 거야.”


“갑자기 고백 타임은 뭔데. 어휴. 진작 말하지. 내가 돌아가신 네 어머니 대신 네 등짝 후려주고 청소 같이 해줬을 텐데.”


“그래….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그러는 동안 집이 좁아지면서 거의 움직이는 동선이 한정되게 됐어. 나중엔 베란다 근처에도 안 가게 된 거지. 창문이야 내 방 쪽에도 많았으니까. 혼자 산다고 허전해서 처음에 화분도 막 갖다 놓고 그랬잖아? 그때쯤 토끼 두 마리 사서 사진도 맨날 찍어 올리고 그랬는데 ”


“그래. 생각난다. 하얗다고 ‘올라프’라고 지었잖아. 다른 애는 뭐였지? ‘두꺼비’였나?”


“그냥 ‘개구리’였어.”


“그래 토끼한테 ‘개구리’라는 이름 지어서 내가 이상하다고 뭐라 하니까 혼자 쿨한 거라고 블로그에 오글오글한 글 써놨었잖아.”


“아. 내가 진짜 왜 그랬지?”


“야.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얘들 어떻게 된 거냐고”


“그게 아마 2년쯤 다 되어가나 봐. 엊그제 뉴스 보는데 태풍 올 거라면서, 유난히 ‘대비를 철저하게 해라’. ‘유리창은 이렇게 테이프나 신문을 붙여 놔라’ 계속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잊고 있던 베란다가 생각 난 거지.”


“팝콘 좀 가져와 봐라. 완전 스릴런데? 혼자 찍는?”


“그때 까지도 이상하게 그저 유리창에 테이프나 좀 붙여야지 하는 생각만 한 거야. 창 깨지고 비 들이치는 게 싫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쓰레기들 발로 밀고 지나가면서 베란다에 가서야 생각 난거지. 얘들이”


“정상이 아니군. 아 미안 혼잣말이야.”


“아니야 맞아. 근데 무슨 베란다가 정글처럼 돼 있더라. 내가 샀던 화분들이 무슨 덩굴식물 같은 거였나 봐. 벽에 다 달라붙어서 처음엔 유리창도 잘 안 밀리더라고. 화분에 심겨있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보기 좋은 것들로 막 골라왔던 거지.”


“사진 안 찍었냐? 이따 나랑 같이 가보자. 구경 좀 하게”


“사진은 차마 못 찍었어. 아니 찍을 생각도 안 들었지 나도 놀라서. 아무튼 뻑뻑한 유리창 밀고 겨우 들어갔어. 나는 토끼들이 죽었을 텐데 그걸 어떻게 치우지? 도저히 엄두가 안 나 하면서도 너무 궁금해 미치겠는 거야. 내가 지저분하게 해 놓고 살았어도 직접적으로 남한테 피해 주는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냥 내 공간만 지저분한 것뿐이다. 더러운 건 여기까지만 쌓아 놓는 거다. 합리화하면서….”


“근데 걔들 죽었으면 썩는 냄새 장난 아니었을 텐데? 안 죽었어도 똥 이라든가 뭐 냄새가 날 거 아니냐? 밖에서 멀쩡했던 네가 좀 무서워지려고 한다?”


“그러게 말이야. 근데 그런 냄새는 안 났거든.”



“아. 얘들 앞에 두고 할 얘기는 아니었네. 아무튼 결말은 ‘살아있었다’니까.”


“어. 신기하게 나도 이런저런 생각 하면서 뭔가 이상하다. 냄새라든가 뭔가 죽어있는 느낌은 아닌데, 오히려 내 방보다 덩굴로 가득 찬 베란다가 더 쾌적한 거 같다? 하면서 바닥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풀들 틈에서 푸드덕하고 얘들이 움직이더라고.”


“아니. 진짜 정글 같잖아. 근데 얘들은 뭘 먹고 산거야? 물이나 먹이 주지도 않았다는 얘기잖아.”


“네가 이따 보겠지만 베란다 상태가 완전 정글 그 자체거든. 내가 심었던 화분들이 빨리 자라는 그런 종이었나 봐. 이게 좀 설명이 안 되는데, 언제부턴가 토끼들 물 먹이는 게 귀찮아서 베란다 수도를 아주 약간 틀어놓고 지냈거든. 알아서 물 마시라고. 근데 그게 흐르면서 작은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그렇게 된 거 같아.”


“뭐라고? 진심이야? 이건 뉴스나 동물농장에 나가야 되는 거 아니냐? 무슨…. 그 뭐더라 테라리움? 그런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게 어떻게 보면 좀 어이없는 일이긴 한데, 아무튼 얘들은 또 건강한 상태기도 하고 해서 기분이 묘하더라고. 바닥도 흙바닥이었는데 그게 생각해보니까 똥이 흙처럼 된 거더라. 그래서 풀이 더 잘 자랐는지도 모르고. 처음엔 당황했지만 뭔가 의도치 않게 안정된 상황을 만들게 된 거지.”


“하아. 그래서? 집은 좀 정리했어?”


“일단 베란다 닫아두고 방을 치우기 시작했어. 큰 쓰레기봉투 여러 묶음으로 사다가 무조건 다 버려버렸어. 왜 그랬는진 모르겠는데 그걸 다 치우지 않으면 베란다를 열지 않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얼굴이 반쪽이 됐나? 일단 일어나자. 집에 가면서 더 얘기하자고. 궁금해 죽겠어. 근데 얘들은 왜 들고 온 거야? 나를 집에 데려가서 보여주면 되지”


“어. 일단 일어나자. 그게 말이야…. 내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내 구역 안에서 벌어진 일이잖아? 근데 내가 어떤 스위치를 끈다고 해야 되나?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생태계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좀 무서웠어. 어쩌면 애들은 그냥 내가 없었어도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었는데 괜히 그 문을 열어서 망쳐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근데 얘들은 왜 지금 여기 있는 거냐고. 네가 담아온 쇼핑백에.”


“일단 태풍 때문에 창이 깨질 수 있다고 해서 쇼핑백에 담요를 깔고 넣어 온 거지. 근데 태풍도 생각보다 심하지 않더라. 무의식 중에 베란다에 가려고 이유를 만들었는진 몰라도….”


“그럼 다시 얘들은 베란다로 돌아가는 건가? 무슨 수족관으로 생태계를 꾸미면서 조물주가 된 착각이라도 하는 그런 느낌인데?”


“그래? 물고기 키우는 사람들도 그러나? 차라리 얘들은 어디 초원에 풀어주는 게 나은 걸까? 여의도 공원 같은데 가면 토끼들도 많이 있다던데.”


“그래서 들고 온 거였군? 태풍이 이유가 아니잖아? 얘들을 어떻게 좀 해버렸으면 하는 거잖아? 네 멋대로 키우고 싶다고 데려와서 즐거움은 누릴 만큼 누리고. 흥미가 떨어져서 다 잊어버렸는데 이제 와서 귀찮게 다시 나타난 거지. 이 토끼들 말이야. 아니 네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건가?”


“맞는 말이긴 한데 좀 살살 해라? 가끔 애가 훅 들어와서 사람 미치게 만든다니까? 나도 미안해하고 있다고. 그땐 혼자 버텨내느라 정신없었기도 했고.”


“야. 네가 내 친구고 당연히 나는 먼저 네 입장을 지지하는 편인 건 맞아. 근데 정신 차려. 어차피 애완동물이고 가축이긴 하지만 기르기 시작했으면 책임을 지라고. 다 큰 애가 그런 생각 못하냐? 강아지나 고양이 끔찍이 좋아하는 내가 왜 안 키우는데. 알잖아?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 어렸을 때 느꼈던 책임감, 허무함 같은 것들.”


“내 무책임함이 얘들을…. 아니 나는 다르게 생각도 해봤어. 어쩌면 자유롭게 한 건 아닐까?”


“또 이상한 소리 하기 시작하네. 집 청소하면서 머리는 안 비웠냐? 우연하게 벌어진 일을 네 공으로 만들지 말라고. 토끼들이 미라가 돼서 발견됐으면 그런 소리 잘도 했겠다. 남들한텐 그런 얘기 하지 마. 전에 열대어 키울 때 버린 적도 있다면서.”


“너니까 이런 얘기 하지. 나도 알아. 미쳤다고 그러겠지. 근데 얘들을 공원에 풀어줘야 될 것 같아. 얘들도 자유롭고…. 나도 얘들 없던 것처럼 지낼 수 있고….”


“지금 그 소리가 나와? 물어보는 이유가 뭔데? 나보고 결정하라는 거야? 나한테 미루고 있어 이걸 지금? 아니 내가 뭘 해결할 수 있다고? 나도 너랑 똑같아. 그냥 네 얘기 들어주는 것뿐이라고. 한 번 더 말할게. 정신 차려. 남들 흉내 내고 자랑하려다가 이 지경 된 거잖아. 네 생각을 가지고 좀 살아봐. 토끼들한테 정도 안 들었냐?”


“갑자기 왜 그래. 내 편도 좀 들어줘. 너 말고는 딱히 말할 사람도 없었다고.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극복해보려고 하고 있고 고민하고 있는 거잖아.”


“알았어. 미안해. 얘들 보니까 갑자기 옛날 생각나서 흥분했나 봐. 근데 있잖아…. 버리고, 떠나고, 끝? 그게 끝이 아닌 거야. 도망가지는 말자. 엄한데 버리지 말고 얘들 끝까지 책임질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너 좀 위험해 보여.”


“알겠어. 책임질게. 일단 우리 집에 가서 나 좀 도와줘. 부탁할게.”



BGM♪ REO Speedwagon ‘Can’t Fight This Fee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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