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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근노근 Nov 23. 2022

내 맘대로 서양철학사
-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

왜 내맘대로 서양철학사인가

  일단 ‘동양’철학사나 ‘한국’철학사가 아닌 ‘서양’철학사인 이유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서양’적인 것에 퍽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철학이라는 게 동양이든 서양이든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그득한 건 매한가지지만, 동양철학보다는 그나마 서양철학이 덜 뜬구름 잡는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둘 다 제대로 파고들어 본 적도 없으니 그게 진짜 뜬구름인지 아니면 진지하게 들어줄만 한 이야기인지 나 같은 이가 판단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다만, 고등학교 때 윤리 과목, 한국사 과목을 통해 만난, 그리고 임용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서양교육사, 한국교육사 과목을 통해 만난(새 발의 때만큼이나 만났으려나) 그 철학들에 대한 나의 인상은 그랬다. 

  그러나 그토록 기울어진 가장 큰 까닭은 아무래도, 우리 사회 모든 것들이 다 서양 것들로 꽉 차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 것들로 꽉 차 버린 세상 속에서 나는 태어났다. 서양식 옷을 입고, 서양식 학교에 다니며, 서양식 언어(대부분 일본식 한자의 ‘필터’를 한 번 거친)를 쓰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나는 이미 서양 것에 친숙할 대로 친숙한 놈이 되었고, 서양식 얼개 속에 살아가고 있다. 나를 둘러싼 이 세계를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사실 동양철학이든 서양철학이든 그것 자체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는 않다. 내가 태어난 곳이 동양이라 동양철학에 대해 더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한데, 그런 마음은 하나도 들지 않는다. 그 위대한 철학으로 이 동양 세계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나 하는 냉소적인 생각을 나는 항상 하고 있고, 그건 서양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동양철학이 지배하는 세계든 서양철학이 지배하는 세계든 간에, 나는 그냥 잘 살고 싶을 뿐이고,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흘리지 않고 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나. 거기에 철학은 어떤 기여를 했는가. 

  지금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좋든 싫든 서구의 영향인 걸 무시할 수 없고, 이런 세계를 만든 뿌리를 알고 싶었다. 내가 미욱하나마 ‘서양철학사’를 공부한 이유다. 

  왜 ‘내맘대로’ 서양철학사인가. 솔직히 밝혀야겠다. 서양철학사를 공부했다느니 어쨌느니 했지만, 대중 철학 교양서 몇 권 읽은 게 다다. 아니, 읽어가고 있다. 내 알량한 지식으로 서양철학사를 정리한다는 건 정말 웃기는 일이고 교만한 일이다. 그래서 ‘내맘대로’다. 이 땅,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최대치는 이 정도이며, 이 한계를 극복하고픈 발버둥 같은 것이다. 지금, 여기, 온갖 모순 속에 살고 있는 얄팍한 이 한 인간이 과거 철학자들에게 주제도 모르고 ‘내맘대로’ 까부는 이야기이다.     


어떤 눈으로 

  나는 지금 이 땅의 눈으로 그들을 재단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재단할 깜이 안 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니 그건 그냥 넘어가자. 그저 누구나 떠들 자유가 있는 세상에 태어난 게 다행일 뿐이다.) 철학자들의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 따위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잘 모르지만) 페미니즘의 눈으로, (잘 모르지만) 민주주의의 눈으로, (잘 모르지만) 평등주의의 눈으로. 

  나의 관심사는 위에서도 잠깐 말했듯,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이다. 다들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네 삶의 방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삶의 방식을 만든 정치체제와 문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에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 ‘모순’에 가닿지 않을 수 없다. 그 ‘모순’을 건드리지 않는(심지어 그 모순 안에 풍덩 들어가 있는) 그 어떤 논의도 나는 그저 속 빈 껍데기처럼 느낀다. 그 어떤 위대한 철학자의 말이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때로 너무 강퍅하게 그 ‘모순’의 문제를 ‘현재의 눈’으로 잡고 늘어질 생각이다.                


자연철학자들

  서양철학은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한다. 시기로 따지면 대략 기원전 5~6세기 정도에 해당한다. 그들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다. 

  솔직히 나는 그들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별로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그들의 철학 언어는 ‘현실의 모순’을 건드리지 않는 ‘뜬구름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의미 있는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세상을 해석하는 눈을 ‘신’에서 ‘자연’으로 낮추었기 때문이다. (아직 멀었다. 더 낮아져야 한다.) 즉, 산사태, 화산, 홍수 등의 자연재해를 설명할 때 ‘이건 신이 분노해서 그런 거야’ 따위의 얼토당토않은 해석(그러나 그 시대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해석)을 거부하고 그 까닭을 이제 대부분 자연에서(혹은 다른 식의 설명으로) 찾기 시작했다. 이 세상을 이루는 원리(원질, arche)는 더 이상 ‘신’이 아니다. ‘물’(탈레스)이고 ‘무한자(아페이론)’(아낙시만드로스)며 ‘공기’(아낙시메네스)다. 또 ‘수’(피타고라스)이며 ‘불’(헤로도토스), ‘유(有)’(파르메니데스)가 이 세상을 이루는 ‘본질’이라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 ‘본질’을 여러 개라고 생각한 ‘다원론’ 철학자들도 생겨났다. ‘물, 불, 공기, 흙’(엠페도클레스), ‘만물의 종자’(아낙사고라스), 그리고 현대 과학과 가장 가까운 이론을 이야기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까지. 

  그들은 위대하다. ‘신화’의 철학을 ‘자연’의 철학으로 끌고 내려온 건 아무리 봐도 대단하다. 세상을 이루는 본질이 예컨대 탈레스의 경우처럼 ‘물’이라고 했을 때,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엄밀한 과학 지식이 쌓여있지 않은 그 시대에 ‘신화’에 기대지 않고 ‘현상 너머’를 생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한 걸음이 철학을 발전시켰고, 인간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현실의 그 어떤 모순도 건드리지 못했다.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는 노예제 사회였고, 노예들의 노동으로 여가를 맞게 된 자유 시민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의 결과는 ‘이 땅의 현실’이 아니라, 이 세상 밖 거대한 ‘본질’에 대한 탐구였다. 짐승처럼 취급되는 상것들은 그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철학은 노예들의 피를 짜내며 성장했다. 노예들을 짓밟고 성장한 철학은 그 이후로 2천 년 넘게 자신들의 지적 성장을 뽐내며 훨훨 날아다녔다. 그 내내 노예와 농노와 여성과 이 세상의 낮은 것들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런 철학에서 이 세상의 행복을 구하는 건 혹여 시간 낭비는 아닐까.      

  이제 다음은 자연에서 인간으로, 조금 더 철학을 현실 문제로 들여온 철학자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 한다. 바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다. ‘내맘대로 서양철학사’를 왜 쓰게 됐는지를 구구절절 이야기하다가 정작 철학사 얘기는 별로 하지도 못했다. 앞으로 연재를 쭉 할 수나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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