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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Dec 16. 2023

보길도 가는 길 2


유달산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민어회와 민어탕이다. 큰새 선생님과 종횡무진 선생님은 민어를 앞에 두고 ‘민어울음’에 대해 대화를 나누신다. 민어울음은 민어의 부레에서 나는 소리다. 나는 그냥 맛있게 먹는다.


밥을 맛있게 먹고 땅끝마을로 향했다. 배를 타고 노화도로 가기 위해서다. 갯벌에 갈대꽃이 피면 장관을 이루어 갈대 ‘노(蘆)’, 꽃 ‘화(花)’자를 써 ‘노화도’라 하였다고도 전해 오는 섬인데 보길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배 위에서 바다를 본다. 배는 섬과 섬 사이의 물길을 간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동해는 보통 짙은 푸른색이다. 멀리 수평선까지 물만 가득하다.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 소리가 철썩 쏴아 강렬하다. 보길도로 가는 바다는 오묘한 초록색이다. 투명한 초록이 아닌 뽀얗고 따뜻한 초록이다. 날이 좋아 바람도 없어 바다 위에는 햇빛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윤슬이 비단 이불처럼 펼쳐져 있었다. 편안한 풍경이다.


드디어 노화도에 도착했다. 보길도가 코 앞이다. 다리를 건너니 보길도다. 고산 윤선도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던 중 심한 태풍을 피하려고 이곳에 들렀다가 수려한 산수에 매료되어 정착했던 섬이 보길도다. 마음으로 보길도와 노화도를 연결한 다리를 지운다. 보길도 앞바다에 펼쳐진 전복 양식장을 지운다. 온전히 섬과 바다만 남긴다. 그리고 태풍을 불러온다. 격랑 끝에 섬에 내리는 윤선도가 되어본다. 섬이 안아준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가 배 위에서 출렁이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윤선도가 주로 머물렀다는 낙서재로 향한다. 즐길 락(樂) 책 서(書) 자를 쓰는 ‘낙서재’는 말 그대로 고산이 책을 읽으며 보길도의 삶을 즐기던 곳이다. 야트막한 언덕에 앉아있는 낙서재는 산그늘이 내려앉아 고즈넉했다. ‘우난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라는 어부사시사의 한 구절이 저절로 생각난다. 한두 송이 피어난 꽃이 점점이 붉은 동백나무 사이에서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부우 짧은 울음으로 멀리서 온 객들에게 인사를 한다.


 낙서재 툇마루에 앉아 본다. 거북바위가 눈앞에 들어온다. 이곳은 윤선도가 달빛을 즐겼다는 바위다. 눈을 감는다. 사위는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오로지 달과 한 사람이 있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달빛이 산을 적시고 바위를 적신다. 이마를 적시고 눈썹을 젖게 한다. 세속의 시간 따위는 없는 풍경 속에 고산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낙서재를 뒤로 하고 예송리 바닷가로 달렸다. 아니 큰새 선생님의 날개를 타고 날았다. 섬 남쪽에 위치한 예송리에 도착해 커다랗게 자란 소나무 사이를 내려가자 바다가 나온다. 어라,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가 특이하다. 지금까지 내가 듣던 소리가 아니다. 바닷가에 깔린 동그란 검은 자갈 사이사이를 물이 지나며 내는 소리는 급하게 달려온 바닷물이 모래더미를 훑어내는 소리와는 완연히 달랐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의 손이 돌멩이를 간질이며 같이 놀자 ‘수작’을 거는 소리 같았다. 종횡무진 선생님과 나는 굽이 있는 부츠를 신고 자갈 해변을 걸으며 자르락 자르락 차르륵 차르륵 까르륵거리는 물소리에 맞춰 같이 까르륵 비틀거렸다.


우암 송시열의 시가 적혀있는 글씬 바위로 날아갈 때, 큰새 선생님의 비행 속도가 빨라졌다. 나는 오금이 저렸지만, 아닌 척했다. 종횡무진 선생님은 종횡무진 펄럭이는 날개의 움직임에 맞춰 같이 펄럭였다. 빠른 속도로 좌회전을 할 때는 전생에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난 듯 와락 나를 껴안았다. 아니 덮쳤다….


글씬 바위로 가는 길은 나무가 무성했다. 큰새 선생님께서 나무와 나무가 서로 맞닿아 차양을 만들고 있는 이 길은 한여름에도 시원하다고 설명해 주셨다. 글씬 바위는 절벽에 있었다. 시구는 먹으로 탁본을 뜬 흔적이 남아있었다. 절벽 바위 옆은 벼랑이었다. 벼랑 끝에 서자 저녁이 내려앉는 섬의 해안이 보였다. 노을이 그물처럼 섬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현생인지 환상인지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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