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떤 날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인애 Apr 26. 2019

아주 상징적인

유치하지만 홀가분한 문장

전고운 감독의 영화를 보면 담배가 피우고 싶어 진다. ‘소공녀'도 그랬고, 최근의 '키스가 죄'를 보고도 그렇고. 그래서 전고운 감독이 담배를 사랑하는 골초인가 보다 막연하게 생각했다. 영화 안에서 표현된 캐릭터도 기억에 남는다. 감독이 해석한 아이유는 ‘똑똑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던데, 영화 속 그 똑똑한 친구가 언제나 세상이 말하는 정답만을 행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랑스럽다. 저런 걸 똑똑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사람을 그리는구나. 좋다.


영화를 보고 실질적으로 담배를 산 경험이 있다. '레이디 버드'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피우려고 산 건 아니고 그 영화를 보고 나니 그냥 담배를 사고 싶었다. 안 하던 일을 하고 싶었고 그게 하필 담배였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원래 익숙한 것 마냥 뭐뭐 주세요 하고 말하고 싶어서 R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담배 뭐 피냐고. 내가 필 건 아니니까 이왕이면 누군가에게 소소한 선물이 될 수 있게. 그러면서 뭘 사야 더 자연스러울지 정보도 얻을 겸. R은 조금 어이없어했지만 자기가 피는 종류를 알려줬다. R과 같이 졸업을 준비하며 그가 담배 피우러 나갈 때 나도 갈래! 하며 종종 따라다녔는데. R은 내가 괜히, 나도 담배 달라고 말하면 하나 쥐여주고 재밌어하다가도 내가 진짜 필까 하면 조금 단호한 말투로 말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냥 화단 턱에 걸쳐앉아 지는 하늘을 보며 담배를 한 손에 대충 들고 바람을 맞는 기분이 좋았다. 괜히 그랬다. 아무튼 그렇게 담배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편의점에 들어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알을 굴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뭐뭐 주세요. 최대한 거의 처음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티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아르바이트생은 사실 전혀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게 내가 산 담뱃갑을 쥐고 밤길을 걷는데 기분이 상쾌했다. 담뱃갑에 그려진 징그러운 사진을 보며 으~ 하고 괜히 툭툭 쳐보고. 집까지 잘 모셔와 책상 위에 툭 던졌다. 그렇게 산 그 담배는 한동안 책상 위에 그대로 있다가 R이 생각나 구매한 붉은 담배 케이스 안에 담아 나중에서야 선물했다.

 

(C) 2019. HanInae. All rights reserved. ㅣwatercolorㅣ붉은 담배 케이스


조금 더 과거로 가보자. 내가 휴학했던 때, 곧 꽤나 자주 취해있던 해, 그 해에 ‘안녕 헤이즐'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몸이(좀 심각하게) 아픈데도 담배를 들고 다닌다. 피우지는 않고. 다른 주인공이 왜 그러냐는 듯이 말하자 이런 답을 한다. 아직 불을 붙이지 않았다고. 불 붙이지 않은 담배는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그건 결국 자기가 결정하는 거라고, 대충 이런 대답을 하는 대충 이런 장면. 나는 그 영화 그 자체보다도 그 씬, 그 대사에 큰 감명을 받아버렸다. 맞아 불 붙이지 않은 담배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 하고. 그 해에 한창 많이 만나며 열심히 놀았던 J와 평소처럼 둘 다 취해있던 어느 새벽, 나는 J가 건넨 담배를 들고 말했다. 그거 알아? 이건 내 잠재적 위험성이야. 내가 못 피우는 게 아니라 언제든 피울 수 있음에도 안 피우는 거야. 내가 진짜 하고 싶으면 그냥 할 수 있어. 그건 단순히 담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당시에 나를 지배하던 여러 가지 생각 중 하나 혹은 여러 가지 전부에 걸쳐있는 고민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말이었다.

J에게 받은 그 담배는 한동안 지갑에 그대로 넣고 다녀 납작하게 눌리고 절반은 부러졌다.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너덜 해진 그 상태 그대로 비닐 백에 담아 내 방 한 편의 벽에 붙여두었다. 아직도 붙어있는 그 담배에 대해서 내 집에 방문한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여전히, 그거 내 잠재적 위험성. 하고 말하며 웃는다. 그럴 때마다 유치하고 민망하고 홀가분하다. 그때의 내가 생각난다.


(C) 2019. HanInae. All rights reserved. ㅣwatercolorㅣ잠재적 위험성


'키스가 죄'를 보고서는 진짜 담배가 피우고 싶어 져서 오히려 담배를 사지 않았다. 진짜 실행에 옮길 정도의 욕구는 아니라서. 그래 그 돈이면 차라리 떡볶이를 사 먹지. ‘레이디버드'를 보고 담배를 쉽게 샀던 건 어차피 내가 필 담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인스타그램에서 일 년 전의 오늘이라며 보여주는 사진이 하필 ‘레이디버드' 영화 티켓인 건 무슨 일이지. 타이밍 무슨 일이지. 하필 또 봄인 거지. 봄에 담배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자꾸 나오는 건지. 혹은 그냥 봄이라서 그런 건지.

매거진의 이전글 고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