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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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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인애 Dec 05. 2018

함께 마시는 차(茶)

겨울을 위한 소비

겨울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겨울 초입 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쓸쓸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어 자꾸만 울기 직전의 상태로 안절부절못하곤 했다. 차라리 울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울고 나면 후련해지는 기분이란 게 있으니까. 그런데 애매하게도 울 정도로 슬프진 않아서 전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생각이 소란해진다. 여름이 너무 더워 생각을 이어나가기 힘든 계절이라면, 겨울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꼬리를 물고-또 꼬리를 물고… 무한으로 증식하는 생각 속에서 멍하니 앉아있게 되는 계절이다. 내가 쓴 책의 한 부분에 ‘나는 언제나 조금 덜 소란한 삶을 바란다’고 적었으며, 심지어 며칠 전에 책에서 단 한 문장을 꼽는다면 그 글을 꼽겠다고 브런치 운영진에게 제출했는데. 여태껏 겨울만 오면 소란스럽다. 적절하게 즐거움을 유지하면서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삶을 이어간다는 게 역시나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일이다.

여름에는 나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힘겨워 팟캐스트를 즐겨 들었다. 누군가가 말하거나 웃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걷거나 집안일을 하거나 누워있었다. 그러나 이런 날, 그러니까 쓸쓸한 겨울에는 뜨겁게 우린 차를 마시며 마음을 잘 눌러 담고, 오히려 잠시 생각을 멈추기 위해 무언가를 꾸준히 해야만 한다.


그런 연유로 나는 얼마의 돈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곧바로 여러 종류의 차를 주문했다. 부엌의 서랍장 중 차를 보관하는 칸이 점점 헐거워지는 모습을 다소 조급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참이었다.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의 워크숍을 통해 번 돈이 들어오면 바로 차를 사야지. 차를 두둑이 사둬야지. 두 종류의 홍차와 페퍼민트, 카모마일, 계피와 루이보스. 어쩐지 대부분 뻔한 목록이지만 그만큼 일상적인 차들. 일 년 내내 차를 마시지만, 겨울의 차는 그 어느 계절보다 중요하다. 아무래도 추워서 일까. 누군가 나에게 차에 대한 조예가 깊은가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아무튼 차를 마시는 일은 나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라고, 그 정도는 강력히 주장할 수 있겠다.

(C) 2018. HanInae. All rights reserved. ㅣwatercolorㅣ다즐링

막 서울에 살기 시작했던 때부터 한동안을 함께 살았던 사촌 K가 내가 혼자 살고 있는 집에 찾아왔다. 나는 대략 사 개월 전에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고, K는 일주일 전에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짧은 여행을 다녀온 상태였다. 함께 집안에서 시간을 때우던 중 차를 담은 택배 상자가 집 앞에 도착했다. 상자를 뜯어 여러 종류의 차를 꺼내 정리하고 그중에서 계피와 루이보스가 블랜딩 된 차를 우렸다. 차를 마시면서, 언젠가는 함께 살았던 집에서, 그때는 없었던 소파와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한때에 우리는 친형제 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삶을 공유하며 지냈다. K는 아는 것 하나 없이 서울에 뚝 떨어진 나를 거의 보살폈고, 나는 한동안 비교적 안정적인 울타리 안에서 성인으로서의 ‘나’를 천천히 구축해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만났지만 굳이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그간의 모든 일을 시시콜콜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괜히 웃고 또 웃었다.


내가 수영을 가야 할 시간이 되어서 우리는 수영장까지 함께 걸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걸으면서, 또 먹고 마시면서 틈틈이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나니 너무 힘드면서도 그간의 울적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수영을 마치고 근처 만화카페에서 날 기다리던 K와 함께 집으로 걸어오는데- 또 이상하게 한참을 웃었다. (너무 웃겨서 길가에 주저앉을 정도로) 정말 별 대화를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조금 더 힘들어졌고 몹시 피곤했지만 동시에 믿을 수 없이 상쾌했다. 아, 도대체 언제 이런 기분을 마지막으로 느꼈지? 그전에 언제 이만큼이나 웃음에 많은 시간을 썼던지 모르겠다.
 "아니 왜 웃음치료가 그렇다잖아. 웃기지 않아도 하하하 소리 내서 웃다 보면 진짜로 엔도르핀이 생성된대. 웃기지도 않는데 애써 웃는 모습을 보면 괜히 더 웃겨서 어느 순간 진짜로 웃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잖아."

그러니까 정말로 온통 바보같이 웃은 후에 기분이 좋아져 버린 나로서는 ~카더라 정도로밖에는 들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웃음치료의 명백한 효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 K가 씻는 사이 물을 다시 끓였다. 잠에 들기 전 뜨거운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자야겠다 싶었다. 사람의 온기와 차의 온기 둘 다 있는 밤이구나. 아마 나에겐 이런 게 내내 필요했던 것이다. 나란히 앉거나 마주 앉아 마시는 뜨거운 차. 그러니까 차 마시러 놀러 오시길. 조금 멀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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