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두려움 그리고 기대
대학 시절,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배우자 외도에 대한 주제가 화두로 올랐던 적이 있다. “난 나중에 남편이 바람피워도 나한테만 안 걸리면 좋겠어. 영원히 모르는 채 살고 싶어.”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포크로 피자를 눌러 찍으며 말했다. “왜? 나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진실을 밝히고 응징할 거야.” 나의 결연한 태도에 당황하며 친구가 대답했다. “그래, 너라면 그 포크로 눈알이라도 뽑을 듯.” 다소 과격한 대화였지만 고난을 직면하는 자세가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많은 사람이 문제를 외면하며 살길 원한다. 그 내면에는 어떤 감정이 숨어있을까? 한밤중 자려고 누웠는데 싸하다. 침대 밑에 무언가 있다는 것 같다. 기분이 어떨까? 어쩐지 찝찝할 것이다. 그럼, 만약 그 침대 밑에 있는 뭔가가 집주인이라면? 도대체 언제부터 숨어 들어와 있던 거지? 이렇게 상상하면 대다수가 욕설을 내뱉으며 질색을 한다. 얼마나 무서운가. 앞의 상황처럼 찝찝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심리학에서는 앞에서 느낄 만한 감정을 불안, 뒤에서 느낄 만한 감정을 두려움 혹은 공포라고 부른다.
일상에서 불안과 두려움은 종종 혼용되어 사용된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다르다. 뱀 공포증이라는 말은 있지만 뱀 불안증이라는 말은 없는 것처럼. 구체적 대상에게 느끼게 되는 공포감이 두려움이라면, 실체 없이 느껴지는 막연한 느낌이 불안이다. 다시 말해 공포에는 대상이 있고 불안에는 대상이 없다.
두려움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직면해야 한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해결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해결 방법이 손쉬운 수준은 아니다. 배우자의 외도 사실을 알았을 때 해결 방법은 헤어지기, 용서하기,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기, 외도 상대를 고소하기 등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 무엇 하나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게 바로 외면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외면한다. 마주하는 것 자체가 크나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그 대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외면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배우자의 외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숨긴다고 하여 사랑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의 대상을 못 본척하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불안 상태로 침전한다.
불안이든 두려움이든 간에, 나쁜 정서가 나타난다는 것은 마주할 상황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증거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경계 태세에 돌입한다.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심장이 빨리 뛰며, 소화기관은 잠시 할 일을 멈춘다.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어 온몸이 각성 되는 것이다. 이때의 느낌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그러나 마주하게 될 미래를 똑똑히 쳐다본다면 준비된 몸이 어떻게든 ‘대응’할 것이다. 대응 과정에서 준비된 신체 반응은 유익하게 활용되고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 몸은 평온의 상태로 돌아간다.
반면 우리가 다가올 미래를 외면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불안으로 남고, 신체 반응이 유지된다. 불안으로 숨은 문제는 막연하여서 해결할 수 없고, 그래서 몇 날 며칠 온종일 힘이 들어간 상태로 경계를 서게 한다. 근육이 긴장이 풀리지 않아 목덜미가 단단히 뭉치고, 심장이 무리하여 혈압이 오르고, 소화기관이 작동하지 않아 위장이 기능을 못 한다. 이 신체 반응이 지속되면 몸의 구석구석이 나사 빠진 로봇처럼 삐거덕대다가 “신경성입니다.”라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로버트 새폴스키라는 의학자가 쓴 책의 제목이 흥미롭다. <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가> 얼룩말은 언제나 포식자에게 잡힐 위험에 처해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물네 시간 불안에 떨지 않는다. 전전긍긍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풀밭에 드러누워 여유롭게 풀이나 뜯으며 에너지를 비축한다. 그러다 사자가 나타나면 그때 행동한다. 도망가거나, 혹은 들이받거나! 위험 대상이 없을 때는 최선을 다해 에너지를 아끼고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가서야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 천하태평 때문에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위궤양에 잘 걸린다. 위궤양뿐이랴, 고혈압, 근육통, 소화불량, 과민성대장증후군... 다 불안이 만들어낸 걸작품, 아니 졸작품이다. 현대인은 너무 많은 불안을 품고 살아간다. 대처해야 할 문제는 외면하면서, 불안할 필요도 없는 일에는 얽매여서. 이제는 얼룩말을 스승으로 삼을 때이다.
우리 인생을 집어삼킬 사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얼마나 클까? 밖에서 부스럭 소리가 난다. 그럼 신호를 확인해야 한다. 고개를 빼꼼 빼고, 사자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만약 소리의 근원이 사자가 맞는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처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동굴에 숨어 벌벌 떨면서 사자는 없어,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사자일 리가 없어, 하지만 불안해~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거야,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자. 하물며 사자도 개인 시간이 있게 마련인데 어떻게 얼룩말만 따라다니며 괴롭히겠는가. 만약 불행이라는 친구에게도 삶이 있다면 매일매일 나만 쫓아다닐 리가 없다. 걱정거리 중 80% 이상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더욱 용기를 내어 사자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사자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동굴 밖으로 나와야 한다.
때로는 사자를 확인하려다가 반가운 기회를 만날 수도 있다. 중세시대 배경의 드라마를 상상해 보자. 여기는 우거진 수풀 속, 도적들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다. 그런데 저 멀리 수풀에서 바스락 소리가 난다. 지레 겁을 먹고 쓰러진 고목 아래로 숨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들이 지나가기만 바란다. 이내 수풀은 조용해진다. 그러나 안도하기엔 이르다. 안타깝게도 방금 지나간 사람은 도적이 아니라 전쟁 통에 잃어버린 동생과 그 무리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레 겁먹고 외면한 상황이 어떨 때는 행운이 되기도 위로가 되기도 한다. 패는 까보기 전까지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다.
한 해에는 두 번의 시작이 주어진다. 1월 그리고 3월. 우스운 것은 1월을 기다리는 12월에는 기대하면서, 3월을 기다리는 2월은 불안해한다. 1월은 공짜로 주어진 시작이라면, 3월은 의무적으로 정해진 시작 같달까? 어린 시절부터 2월은 긴장의 달이었다. 반배정은 어떻게 될지, 신학기에 친구들과 어떻게 사귈지, 담임선생님은 누가 될지, 올해는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버릇해서 그런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부터 앞선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과 손잡고 살아간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예측 불가능하기에 인생이 흥미롭다. 버지니아 대학에서 실험된 연구를 보면, 참여자들은 연구에 참여한 대가로 고급 초콜릿 또는 머그잔을 선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참여자는 세 그룹으로 나누어졌는데, 첫 번째 그룹은 초콜릿과 머그잔 중 무엇을 받을지 알 수 있게 했고, 두 번째 그룹은 두 가지 모두를 주기로 했다. 마지막 그룹의 참가자에게는 어떤 대가를 받게 되는지 말하지 않았다(무언가를 받는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리고 모든 참가자의 감정을 측정한 결과, 어떤 선물을 받는지 예측하지 못한 세 번째 그룹 참가자들이 가장 행복했고, 그 기분이 더 오래 유지되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세탁실을 뒤져 엄마가 숨겨놓은 선물을 찾은 적이 있다. 포장을 살짝 열고 선물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날 밤은 어쩐지 설레지 않아 곧장 잠이 들었다. 분명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잠을 설쳤는데. 마음의 변화는 고작 한 살 더 먹어서 나타난 현상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찾아올 미래가 예측 가능하다면 우리 인생은 시시해진다.
‘내일’은 포장된 선물과 같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 포장지 안에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게 들어있으면 어쩌지.’ 미리 고민하거나 ‘그 포장지 안에 무서운 뱀이 숨어져 있으면 어쩌지.’ 지레 겁을 먹는다. 불안한 마음에 포장지를 뜯지 못한다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선물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일 년 열두 달, 나는 한 달 한 달을 랜덤박스라고 상상해 보자. 얼마의 금액을 내면 그 금액보다 비싼 제품이 그득 담겨있는 상자. 거저 얻은 인생에서 우리는 돈도 안 내고 매 순간을 선물로 받는다. 그 선물이 언제나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다. 어떤 날은 따뜻하지만 어떤 날은 뜨겁고, 어떤 날은 축축할 것이다. 보송하고 맑은 날이 있는 반면 서늘한 날도 있을 것이다. 뽀얀 눈이 오는 날도 있지만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드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기다리는 동안은 불안보다 기대를 선택하는 것이 어떨까? 우리의 인생은 선물을 받는 순간보다 선물을 기다리는 여정이 더 기니까.
어린 시절, 아빠, 빵 사 와! 전화를 끊고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설탕 시럽이 뿌려진 바삭한 페이스트리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아빠 손에 쥐어진 봉투에는 설탕이 알알이 묻어있는 ‘도나스’가 담겨있었기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빠는 늘 오답을 선택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니까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면 월드콘 대신 메로나와 바밤바를, 치킨을 사 오라면 양념치킨 대신 전기구이 통닭을, 과자를 사 오라면 몽쉘 대신 빠다코코넛을 사 온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던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혹시 이번엔 제대로 사 올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그러면 정말 어떤 날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짜잔, 하고 나타났다.
나이가 들어보니 설탕 도나스가 왜 이리 맛있는지 모른다. 나에게 오답이었던 것이 아빠에게는 정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선물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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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KBS1 세상의 모든 정보 [라디오심리극장]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었는데요
문자 사연에 대한 답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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