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
“거봐요. 오늘도 비가 오죠?”
창밖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나를 학생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난주 강의를 마치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유독 비 오는 강의가 있어요. 그 강의는 학기 내내 비가 와요. 이번 학기는 우리 강의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 강의 올 때는 꼭 우산을 챙겨오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벌써 이 주 연속 비가 내렸다. 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그때마다 나는 말했다. “거봐요. 오늘도 비가 오죠?” 학생들은 신기하다는 듯 저마다 구시렁거리며 창밖을 가리켰다.
사실 신기한 이야기는 아니다. 3월에 개강하는 1학기는 봄에 시작하고, 봄에는 자주 봄비가 내린다. 봄비는 3월 내내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흩뿌려졌다 사라진다. 세 시간의 강의를 하면, 비는 강의 시작 전이나 강의 중이나 강의가 끝날 때 한 번쯤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확률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 현상을 신비로운 주문처럼 믿어버린다.
물론 3월 내내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라서 어떤 강의 날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왜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느냐며 의혹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비가 오는 날에만 신념을 떠올리며 역시 신기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다.
인간은 한번 신념을 형성하면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증거만 골라 찾아내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신념에 반하는 증거는 무의식적으로 보지 않게 되는데, 쉽게 말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심리를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우리 강의에 항상 비가 온다는 신념이 움트면, 비가 올 때마다 날씨에 주목하며 신념을 확신한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증거 찾기를 건너뛴다. 그래서 머릿속에는 비 오는 강의 날만 각인되고 믿음은 실제가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보고 싶은 대로만 볼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가령 내 인생에는 행복만 가득해, 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좋은 일이 일어나는 순간만 의미를 부여할 것이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일에는 눈을 감을 테니,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건강한가?
그러나 확증편향은 봄비를 보는 시선처럼 아름다운 일에만 꽂히지 않는다. 우리의 신념이 늘 행복을 좇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은 언제나 재수가 없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제가 얼마나 재수가 없느냐면요. 시계를 봐도 꼭 4시 44분, 6시 6분이에요.” 그래서 내가 말했다. “선생님! 지금 시계를 봐보세요.” 시곗바늘은 12시 7분을 지나고 있었다. 민망한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자신이 불행한 증거를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울한 사람은 우울함을 증명하기 위해 불행 찾기에 몰두한다. 인생에 일어난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에만 유독 주의를 두며 그것이 나의 인생이라고 정의한다. 거봐, 내 인생은 늘 이런 식이야. 언제나 되는 일이 없어. 당신은 맨날 그런 식이야. 우울한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표현은 늘, 항상, 언제나, 맨날, 반드시, 와 같은 말이다. 늘, 항상, 언제나, 맨날, 항상, 반드시, 라는 말은 늘, 항상, 언제나, 맨날, 반드시 오답이다. 객관식 보기를 풀 때도 이것은 암묵적인 규칙이다. 그래서 그들의 신념은 늘, 항상, 언제나, 맨날, 반드시 틀린다.
하루 24시간 내내 좋은 일만 일어나는 인생은 없다. 잘 풀리다가도 꼬이고, 꼬인 게 있으니 또 풀리는 게 인생이다. 꼬이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보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까움을 과대평가한다. 슬픈 순간은 고작 몇 시간이고 그 외의 아무런 일도 없는 순간이 가득한데, 우울을 뒷받침해 주는 순간에만 주의를 두면서 삶이 불행하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들이 보는 세상은 늘, 항상, 언제나, 맨날, 반드시 어둡다.
확증편향은 불편한 진실을 거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형편없는 상대와 사랑에 빠진 친구를 생각해보자. 옆에서 아무리 그 사람의 나쁜 모습을 말해줘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 사람의 좋은 점만 볼 뿐이다. 이것 딱 하나만 고치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우기지만, 그 딱 하나는 지나치게 치명적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골초가 오래 산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은 운동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확증편향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번 정한 마음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믿음은 경험에서 비롯되고, 경험을 부정해야 신념이 바뀌기 때문이다. 신념을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아프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증거만 찾고, 그렇지 않은 증거에는 눈을 감는다.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교류를 거부하기도 한다. 정치관, 종교,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하고만 소통하고, 관련 기사만 골라 보고, 해당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다 보면 세상은 온통 나와 같은 사람으로 가득 차 보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거부하거나 그 사람을 비난하면서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면 생각을 유지하기란 더욱 수월해진다.
한 타임 슬립 드라마에서는 유튜브의 성공을 보고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유튜브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회사 간부는 유튜브 들어가 보면 매일 야한 영상이나 뜨는데, 그런 불쾌한 플랫폼이 성장할 리 없다며 주인공의 제안을 묵살한다. 미래에서 온 주인공은 ‘그건 당신이 평소에 야한 것만 찾아보니까 그렇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SNS의 발달은 확증편향을 부추기고 있다. 야한 것만 즐기는 간부의 유튜브에 야한 영상만 떴던 것처럼, 사용자의 관심사만 선택적으로 노출하면서 우리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던 것을 넘어서 이제는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세상, 내가 선호하는 조건, 나만의 생각이 ‘일반적’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내 생각이 정답이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의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몇 해 전 고열로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의사는 코로나와 독감을 의심했다. 몇 차례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음성이지만 의사는 독감을 확신하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약을 먹어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은 나는 결국 응급실에 실려 갔다. 그리고 신장에 물이 찼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투석을 해야 할 정도라는 말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확증편향은 단순히 시야를 좁히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확증편향은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 오류를 범하게 한다.
어떠한 믿음은 가능성을 방해한다. 다르게 봐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신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의혹은 나를 살리는 계기가 된다. 우울한 줄 알았던 내 인생에도 희망이 움트고 있고, 별것 아닌 줄 알았던 사건이 위협적인 사건이었을 수도 있고, 내 생각만 옳은 줄 알았는데 더 좋은 판단이 인생을 꽃길로 인도할지 모른다.
확증편향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다양한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다양한’이다. 책을 한 번도 안 읽은 사람보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한 권의 내용을 진리로 여기고 매몰된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고 해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책만 읽는다면 그것 역시 한 권만 읽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념에 반하는 메시지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확증편향의 기저에는 불안이 숨어 있다. 내 신념이 틀리면 어쩌지, 두려워하는 사람은 반대되는 주장을 방어한다. 그러니 자신 있다면, 정말 확실하다면 오히려 정면 돌파를 해보자. 다른 아이디어는 일단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다른 관점의 세상에 발도 담가보고 어떤 의견은 수용해 보고, 또 다른 생각을 마주할 때는 틀리다, 가 아니라 다르다, 는 결정도 내려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능성이 풍성한 곳으로 변할 것이다.
확증편향을 고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해서 치우치지 않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원래 기울어진 마음을 가지고 사는 존재라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한층 더 성숙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강의가 시작되고 6주간 놀랍게도 비가 왔다. 더욱 신기한 것은 휴강 한 7주 차에 해가 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법의 주문은 여기까지였다. 8주 차에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봄비가 오는 3월은 이제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창밖을 보며 또 이 말을 던졌다. “거봐요. 오늘도 비가 오죠?” 비라니? 파랗기만 한 하늘을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학생들에게 나는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꽃비!”
창밖으로 벚꽃잎이 비처럼 쏟아져 날라고 있었다. 비를 보겠다는 기대가 꽃마저 비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당신은 어떤 세상을 보며 살고 싶은가? 편향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아름다운 쪽으로 기울이는 건 어떨까.
이번 주 방송 <라디오 심리극장>에서도
영화 <잠>의 줄거리를 '확증편향'으로 해석해보았는데요
관심있는 분들은 들어주세요
55분 35초부터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