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려면
시커먼 그림자가 문제집 위로 어른거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남자가 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한마디를 건넸다. 야, 너 피부가 괴물 같아. 반년을 같이 입시학원에 다니면서도 말 한번 섞지 못한 남학생이었다. 사람의 얼굴에다 대고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그 말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나의 피부가 흉측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드러기가 온몸을 공격했다. 수험생의 정체성을 가진 내내. 그러나 신기하게도 11월 14일 오후 5시 그것은 기적처럼 후퇴했다. 수능 날이었다. 수능을 준비하는 과정은 이토록 괴로운 이벤트다. 대학은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관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과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학교를 나가게 된 결정적 이유는 따돌림이었지만, 학교를 나갈까 고민을 시작한 건 그보다 앞선 시기였다. 성적이 제법 나오는 ‘여’학생이었던 나는 문과에 가서 교대를 진학하는 목표를 세움‘당했’다. 단 한 번도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문과에 갈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나의 목적지를 이미 결정해놓았다. 대한민국에서의 인생이란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잠자코 따라가는 것이다.
잠자코 따르는 삶은 매년 듣게 되는 말로 증명할 수 있다. 먼저 1학년, 너 유치원생 아니야. 2학년, 너 1학년 아니야. 3학년, 너 어린애 아니야. 4학년, 너 저학년 아니야. 5학년, 너 이제 6학년이야. 6학년, 너 이제 중학생이야. 중학교 1학년, 너 이제 초등학생 아니야. 중학교 2학년, 너 이제 중3이야. 중학교 3학년, 너 이제 고등학생이야. 고등학교 1학년, 너 이제 중학생 아니야. 고등학교 2학년, 너 이제 고3이야. 고등학교 3학년, 너 이제 수능이야⋯.
수능이라는 행선지 티켓을 끊은 한국인에게 낯선 길을 걸어보는 자유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시간 낭비하지 않고 디딜 다음 스텝에만 온 신경을 기울인다. 그렇게 정해진 각본에 따라가다 보면 삶의 목적의식이 사라진다. 어쩌면 처음부터 없어 생길 기회조차 잃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생애 주체들이 의심 없이 걸어가고 있는 걸까?
각본을 따르는 동안에는 문제의식을 품지 못한다. 그러나 정해진 각본은 길어야 청년의 때까지만 쓰여있다. 이후 열린 결말은 스스로 써 내려가야 한다. 지시문 없이 살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막막함과 조우한다. 후회하기에도 늦었다는 생각이 들면 이제라도 다르게 살아 보겠다는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늘 지루하다.
돈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누군가는 이렇게 답했다. 출근이요. 이처럼 외부에서 오는 이유로 행동하게 되는 힘을 외재적 동기라 한다. 돈, 인정, 칭찬, 명예, 관심과 같은 보상이나, 의무, 책임감으로 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경우다. 수능이 그렇다. 대학을 가야 하니까 가는 것이지 가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닐 테다. 외재적 동기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나 그 움직임은 떠밀림에 가깝다.
반면 내 안에서 나오는 힘도 있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증권가를 그만두면서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라고 애원했던 것처럼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일이 있다. 흥얼거림을 참지 못해 코인노래방에 가고, 머릿속에 맴돌아 게임을 켜는 것처럼 즐거움, 흥미,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 내재적 동기다. 내재적 동기는 스스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다.
내재적 동기는 취미로 시작되어 생산을 향해 갈 수 있다. 이제는 판사보다 작가로 더 유명한 문유석을 보면 그렇다. 그는 자신의 저서 <쾌락독서>에서 심각한 책벌레였던 어린 시절을 고백했는데, 그가 책을 읽은 이유는 지적 호기심이 아닌 성적 호기심이었다. 책을 선정하는 기준이 야한 장면의 유무라고 말할 정도로 성에 대한 흥미가 그를 책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러나 야한 장면을 찾아보던 청소년은 점점 책 읽는 행위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자연히 독서에 취미가 생겨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자고 권할 때 많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말이다. 에스카르고를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은 자신이 그 음식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낫또를 먹어본 적 없는 사람도 그 음식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좋은지 아닌지 결정하려면 먼저 경험해봐야 한다.
좋아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다면 닥치는 대로 뭐든 해야 한다. 커피를 마셔도 되고 산책을 해봐도 된다.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바깥 구경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러다 갑자기 충동적으로 내려 이름 모를 식당에서 처음 보는 메뉴를 시켜볼 수도 있다. 시간과 비용에 제한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훌륭한 경험이 된다. 가만히 앉아 옆 테이블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고, 카페에 꽂힌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의 삶을 엿봐도 괜찮다. 그러다 문득, 이거 재밌는데? 혹은 재밌겠는데?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시도해보면 된다.
세계가 열광하는 영화감독 봉준호는 어릴 때부터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이미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말이다.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놀이터에서 뛰어 놀아보기도 했을 텐데, 영화를 볼 때가 가장 좋았으니 삶의 목표도 생겼다. 그의 꿈의 탄생 배경은 영화를 본 ‘경험’이다. 경험 중 골라 취미를 만들고, 즐거움을 생산적 활동으로 바꾸면 된다. 그것이 바로 덕업일치다.
덕업일치란 취미를 뜻하는 일본어인 오타쿠オタク의 한국어 발음인 ‘오덕’ 그리고 ‘직업’이 일치된다는 뜻의 신조어다. 즉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덕업일치를 이룬다고 하여 인생이 활짝 피는 건 아니다. 덕업일치에는 큰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한 할아버지가 매일 마당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매일매일 천 원씩 주면서 마당에서 신나게 놀아달라고 부탁했다. 용돈도 받고 놀이터도 생긴 아이들은 신나게 마당을 찾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갑자기 말을 바꿨다. 형편이 어려워져서 백 원씩밖에 줄 수 없게 되었다고. 실망한 아이들은 노는 것에 흥미를 잃고 집으로 돌아갔다. 좋아하는 일이 돈을 벌어다 주기 시작하면 흥미는 떠나간다. 외재적 동기가 내재적 동기를 삼키는 것이다. 과잉 정당화 효과라고 한다.
인생은 모순의 연속이다. 삶의 목적을 찾는다고 좋아하는 일을 알아내도 직업이 되는 순간 마음이 떠난다. 그러나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내면의 힘을 지킬 수 있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리사가 있다. 재료 손질, 칼질, 플레이팅이 즐거워 요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과정에서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입소문이 나면서 좋은 평가를 받겠다, 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 요리는 과제가 되었다. 덕업일치가 과잉 정당화로 무너지는 이유는 과정에서 결과로 시선이 넘어갔기 때문이다. 칼질 그 자체를 즐기고 손질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 그래야 내면의 즐거움을 지킬 수 있다.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여러 번 허망함을 느꼈다. 논문이 지나치게 어렵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쓰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당시 나에게 연구의 정의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정보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단어로 표현하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지친 일상의 보상으로 틈만 나면 SNS에 돌아다니는 웃긴 사진(밈)을 보며 보냈는데, 결코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맡자마자 최신 유행 밈으로 심리학을 해석하는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들을 보며 나만의 강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단어로 표현된 연구를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설명으로 바꾸는 일. 일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가자 가르치는 게 즐거운 취미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하루에 두세 시간을 웃긴 영상과 사진을 보는 데 쏟는다. 그러다 보면 글감이 떠오르고 강의 아이디어가 따라온다. ‘덕’이 ‘업’이 되었다.
덕업일치는 특별한 사람의 영역,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먼 세상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덕업일치의 목적지는 대단한 성과물을 내는 작품활동도, 지난한 경쟁의 끝에 이룩한 승리도 아니다. 운전을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F1 선수가 될 필요는 없고, 몽상을 좋아한다고 철학가가 될 필요도 없다. 출장이 많은 일을 찾거나, 직장 내 회의 중 다양한 아이디어를 던지면 그만이다. 사람을 잘 위로한다 해서 반드시 상담가가 될 필요도 없다. 직장 동료의 어려움에 관심을 품고 볼멘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는 역할을 맡으면 충분하다. 음악을 좋아하면 플레이리스트를 선정하는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되어도 행복하고, 사진을 좋아하면 일하는 순간을 기록하기만 해도 즐겁다. 매 순간 좋아하는 일이 껴 들어올 틈만 있으면 그것이 덕업일치다.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살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채워야 한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면 과정에 부담이 줄고, 즐기면서 결과는 자연히 좇아온다. 그날에 만나게 될 결과는 예상치 못하게 대단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한 아버지가 작은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그래도 대기업에 다니며 안정적인 삶을 꾸리는 게 행복하지 않겠니? 아들은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지금 행복하신가요?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은 지 오래였다.
수능이 끝났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각본 없는 삶을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경험은 결정이다. 결정하고 실망해 보고, 결정하고 깨달아 보고, 결정하고 행복해 보고, 그렇게 빈 대본을 채워나가야 한다. 이때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길을 정해주지 않는 것, 조언을 멈추는 것이다. 한 번도 다른 삶을 선택해 본 적이 없기에 조언은 종종 길을 엇나간다. 정답이라 믿었던 선택은 틀릴 수 있다.
물론 어떤 조언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겪고 선택하지 않는 한, 흥미를 꺾는 압력이 될 뿐이다. 직접 느끼고 즐거울 때라야 하고 싶다는 마음에 압도된다. 절대 선생님이 되지 않겠다는 내가 강사로 사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도 혹시, 하고 생각한다. 그때 아무도 교대에 가라고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도 학교 선생님이 되지 않았을까?
조언은 자신의 안경을 타인에게 빌려주는 행위라 한다. 내 시력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다른 사람의 눈은 핑핑 돌게 만든다. 나의 도구는 나의 것, 나의 경험도 나의 것이다. 내가 선택한 길은 내가 살아온 세계에 한정된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으로 남겨둬야 한다. 이제 누군가의 삶에 답을 쥐여주는 것은 멈추고 내 삶에 또 다른 정답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 첫 번째 단계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시작될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