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의 8월, 서핑과 마음
이달의 심리학 8월의 한 꼭지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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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합니다 �
튜브 없는 해수욕은 정말 무섭다. 하지만 겨드랑이가 튜브에 걸쳐지면 몸이 조금 더 높게 떠서 얕은 물에도 발이 닿지 않아 더 무섭다. 처음 맨몸으로 바다에 서있었던 때가 생각난다.
거추장스러운 튜브를 내팽개치자 파도가 기다렸다는 듯 밀려왔다. 나는 뒤돌아 모래사장을 향해 달렸다. 파도는 물살을 거르는 나보다 늘 빨라서 뒤통수를 정면으로 때렸고 나는 계속해서 물을 먹었다. 여러 번 그런 일을 당하고 수영을 포기하려는데, 아빠가 말했다. 파도가 올 때 점프를 해. 그러면 빠지지 않아. 파도가 오길 기다리다 박자에 맞춰 뛰었다. 점프. 몸이 파도에 실려 오르락내리락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파도를 타니 파도가 나를
삼키지 않았다.
인생에도 파도가 밀려온다. 그것은 이따금, 혹은 아주 자주 찾아온다. 어떤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해서 찾아오는 건 아니다. 자연이 바람을 일으켜 파도를 만들 듯, 세상은 어려움을 일으켜 고난을 만든다. 그러나 감당해야 하는 건 억울하게도 온전히 우리 몫이다. 그때 우린 도망칠 수 있을까? 전혀. 파도는 도망가는 우리의 뒤통수를 덮칠 것이다. 코와 입에 소금물이 들어와 더 아플 것이고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이다. 우리는 도망가는 대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파도를 타기. 두둥실.
파도를 타려면 파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파도를 쓰나미로 보고 겁을 낸다. 균형만 잡으면 될 일인데,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간다. 도망가다 넘어져 더 크게 다친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끔찍한 불행으로 가득 찼다. 물론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극히 드물지만.” 우리가 괴롭게 정의하는 삶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 아님에도 우리는 충분히 고통받는다. 그렇다고 믿으면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쁜 상념이 나를 흔들 때는 상념이 현실이 아님을 인정한다.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저 인식해본다. 이를테면 이렇게 말이다. 내 인생은 불행해, 에서 멈추는 대신 내 인생은 불행하다고 내가 생각하고 있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멍청해, 에서 멈추는 대신 나는 멍청하다고 내가 생각하고 있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에서 멈추는 대신 역시 이럴 줄 알았다고 내가 생각하고 있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이 늘 사실인 것은 아니어서 생각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만 해도 부정할 힘이 생긴다.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게 사실은 아니잖아? 하고 말이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인생의 파도
고난은 세 종류가 있다. 내가 해결하는 것, 시간이 해결하는 것, 해결 못 하는 것.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면 내가 얼마나 멍청한 줄 알게 되고, 운동을 하면 내가 얼마나 나약한지 알게 된다. 하지만 멍청해 보이는 건 똑똑해지는 과정이고 나약해 보이는 건 튼튼해지는 과정이다. 부족함이 눈에 들어온다는 건 나아질 가능성이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가 처한 대부분의 어려움이 사실은 해결하는 과정 속 한 장면이다. 노력하는 것이 힘들어서 문제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풀면 그만이다. 풀 수 있는 문제를 푸는 일, 우리는 그 결과를 극복이라 부른다.
화불단행禍不單行, 불행은 혼자 다니지 않는다. 돈 쓸 일은 한 번에 생기고, 할일은 한 번에 밀리며, 이 사람 저 사람 동시에 나를 괴롭히고, 아플 땐 여기저기가 다 아프다. 갑자기 많은 문제를 맞닥뜨리면 압도되어 무너진다. 하지만 압도된다는 건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아니다. 엉킨 매듭은 당장에 보이는 부분부터 차근히 풀면 된다. 천천히 조금씩 풀다 보면 결국에 풀린다. 우리에게는 시간과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인생의 파도
십 년 차 경력직을 뽑는 자리에 들어가고 싶다. 그런데 지금 구 년 차다. 나는 실패한 걸까? 아니다. 일 년을 더 노력하면 된다. 이처럼 어떤 문제는 연륜과 경험, 그러니까 시간이 해결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 마음이 구겨졌을 때, 큰 실수로 신뢰를 잃었을 때, 다친 몸이 회복되어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다.
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는 기다림에 미숙하기 때문이다. 약한 불에 오래 구워야 하는 음식도 냅다 센 불에 올려 곧바로 태워버리기 일쑤다. 조급하게 처리하면 일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엉망이 된 후에 다시 시작하면 더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해결하는 문제에서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중요하다.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그동안 불안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이럴 땐 그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야 한다. 가스 불을 약하게 켜고 설거지를 하거나, 주방에 먼지를 닦는 것처럼 그 시간을 지루하게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일에 애쓰다 보면 그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많은 일을 이룬 자신이 기특해질 것이다.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파도
몇 해 전, 희소 난치병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와 같은 진단을 받은 환우를 알게 되었다. 그는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픔을 공감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지쳐 있었다. 정확히는 분노에 차 있었다. 그러다 같은 처지인 나를 알게 되었고 매일 나에게 전화했다. 오늘은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내 고통의 감정을 내게 토로했다. 잠을 잘 수가 없고 통증이 점점 심해진다며 때로는 죽고 싶다고 했다. 내가 위로할 때마다 그는 거절했다.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고,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고, 우리는 영원히 낫지 못할 거라고 했다. 저주에 가까운 통화에 나는 영혼이 죽어감을 느꼈다. 조용히 그의 연락처를 삭제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붙들고 있으면 괴로움만 커진다.그럴 땐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찾아온 거라고. 그저 그렇게 된 거라고.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잠잠해진다. 할 수 없는 것에 더 이상 목메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볼 여유가 생긴다. 병을 치료할 수 없다면 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게 된다. 통증을 줄이는 약을 찾고 악화되지 않도록 마음을 단련하면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시험 시간 내내 머리를 쥐어 짜내던 학생이 기억난다. 그 친구는 한 문제를 붙들고 있었다. 그러느라 뒷장에 있는 문제를 못 봤고 결국 낙제점을 받고 말았다.정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는 붙들고 있어 봐야 소용없다. 빨리 포기해야 다른 문제를 풀 수 있다. 포기는 때로 용기가 된다.그 용기로 지킨 에너지가 다른 삶을 살게 한다.
나는 굉장히 일희일비하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내가 싫어 기복을 줄이려 애썼다. 좋은 일에도 기뻐하지 않고, 나쁜 일에도 시큰둥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건 아니었다.
강의하는 삶을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널뛰게 되었다. 한 사람은 강의 중 눈물을 흘리며 인생 강의였다고 감사를 표하면, 그날 밤 강의평가에서 또 다른 사람이 남긴 험한 말을 봐야 한다. 나는 이 일을 시작하고 더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내가 좋아졌다. 일희일비를 반복하며 깨달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는 소리 하다가도 내일이면 또 좋다고 웃겠구나. 언제나 그랬듯이. 이제 나쁜 감정을 만나도 괜찮다. 일비가 오면 반드시 일희가 오니까.
감정은 파도와 같다. 물살이 세게 밀려오면 반드시 뒤로 빠진다. 계속 몰아쳐 들어오는 파도는 없다. 해안선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결코 더 깊어지거나 얕아지는 법이 없다.
서퍼는 파도를 보고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파도를 보고 있다 보드에 올라탄다. 몸은 흔들리지만 중심을 잃지 않는다. 나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도 마찬가지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감정에 올라타 보기도 하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 흔들리겠지만 중심을 잡고 때로는 그 흔들림을 받아들이면서. 뻣뻣하게 서 있으면 넘어진다. 그러나 흔들리면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어떤 환경의 어려움에도 중심을 잡는 마음, 바로 심리적 유연성psychological flexibility이다.
서핑에서 정말 위험한 건 파도가 아니다 발에 묶인 보드다. 보드가 뒤집어져 머리라도 치면 정신을 잃고 물에서 헤쳐나올 수 없다. 누군가 도울 수도 없다. 삶의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다치게 하는 건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끄는 마음가짐이다. 마음가짐이 방향을 잃고 나를 해칠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바다에서 살아남는 법은 파도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나를 위험에 처하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에는 언제나 파도가 밀려온다. 피할 수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그러나 파도에 몸을 맡기면 즐길 수 있다. 서퍼는 파도가 거세지길 기다린다. 서핑을 배우면 파도는 재앙이 아닌 기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