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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인제주 Nov 13. 2018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 in other worlds

제주도 시골 민박집 주인장의 일상 이야기 (03)


찾았다.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


이 책이었다. 스탠다드 재즈 넘버들을 소제목으로 했던 소설. 재즈 이야기여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긴 시간 이 책을 다시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 무라카미 류였어. 거의 이십 년 전에 읽었던 책인데 꼭 한번 다시 읽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내용도 거의 생각나지 않지만 'Fly me to the moon'의 가사 중 'in other words'라는 부분을 'in other worlds'라고 알고 있었던 이야기만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아마도 이때까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서 놀라움이 컸기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 책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 'in other worlds'인 편이 더욱 절절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이십여 년 만에 다시 펼쳐 든 책에는 역시 한심하고 시시한 남자들의 이야기만 가득했다. 다행히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에도 이 남자들이 멋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 정말 다행이지 뭐야 - 시간이 흘러 주인공들과 같은 나이가 되어 버린 나는 이들이 더없이 하찮게 느껴지는 것이다. 일본 버블 경제 시절 본인의 능력치 이상으로 쉽게 큰 성공을 경험하고는 세상 모든 것들과 모든 여자들을 시시하게 치부하는 밥맛없는 남자들. 겉모습은 그럴싸하게 흔치 않은 브랜드의 명품으로 감싸고 '네가 알아볼 수 있을지나 모르겠는데, 그렇고 그런 흔한 것들이 아니야'라며 우쭐대고 있겠지만 실상은 슬슬 줄어가는 머리숱에 탈모 걱정이나 하고 있을걸. 흥. 아, 이러려고 시작한 글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였을까. 재즈 이야기였을까, 책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을까. 시시한 남자들 욕을 실컷 하고 났더니 말문이 막혀버렸다.


in other words(in other worlds), hold my hands

in other words(in other worlds), darling kiss me


Fly me to the moon을 들으며 절절한 사랑을 꿈꾸던 스무 살의 나, 는 어느덧 아는 게 많다고 잘난 척하는 남자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고, 가진 게 많다고 거들먹거리는 놈도 꼴같잖고, 흔한 남자들의 뻔하디 뻔한 플러팅에는 좀처럼 설레지 않는 그저 시큰둥하고 나이 많은 센 언니로 늙어지고 말았다. 스물아홉 살에는 영화 <싱글즈>에서 '서른이 되면 결혼을 했거나 직장에서 자리를 잡았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며 한탄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그러게, 나도. 어떡하지?'라고 고민했던 기억이 있는데 서른아홉의 현실은 더욱 가혹해 스물아홉 시절의 고민이 그저 귀여워 보일 지경이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은 때려치웠지, 비수기의 화산도 제주섬에서 보릿고개를 보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다시 혼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아홉 시절보다 불안하지 않은 건 나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강해졌기 때문일 테다. 뭐, 그렇다고요. 연애니 돈이니 소소한 결핍 따위 있을지언정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제법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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