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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서 Oct 24. 2022

H에게

H,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 14살 무렵, 이제 막 아기 티를 벗은 아이들. 그때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이 조각나 있었어. 너는 항상 온몸에 시퍼렇다 못해 까만 멍이 들어 있었고, 나는 숨통이 막히는 듯한 불안 속에 매일을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래도 그때 우린 살고 있었어. 가쁜 호흡이었지만 나눠 마시고 있었어. 누군가 자신의 외로움을 알아 봐주길 기다리던 가여운 아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알아봤고, 기어코 친구가 되어주었으니까. 나와 같은 처지의 친구라니. 참 비극적이지만 그땐 우리가 서로의 구원자라고 그렇게 믿었어. 동그란 눈에 청아한 목소리, 그런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터프한 말투와 행동들. 사실 그런 네 모습에 반했던 것 같아. 사소한 행동 하나도 너를 따라 하면 강해지는 느낌이었어. 그 시절 난 너처럼 되고 싶어서 괜히 허공에 욕지거리를 내뱉어 보기도 하고 쓸데없이 인상을 쓰고 다녔는데, 그때의 버릇은 아직도 내 이마에 잘 새겨져 있어. 거울을 보며 이따금 너를 떠올리게 되겠지. 어쩌면 다행인 걸까.


모여서 나쁜 짓도 참 많이 했었어.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나쁜 짓이었을까 반문하게 돼. 그건 우리에게 이런 운명을 던져준 세상에 대한 소심한 반항 정도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우리의 삶이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곤두박질치던 때, 나는 너를 떠나 이곳으로 도망 왔어. 타고난 회피의 성향. 난 새로이 부여받은 삶을 사랑했어.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원래 그늘이 없던 사람인 것처럼 나와 사람들을 속이고 살았어. 웃기지. 그렇게 너를 기억 한구석에 묻어두고서 말이야. 너를 사랑했지만 너를 떠올리면 그 시절에 받은 상처들이 생각나서 그걸 견딜 수 없었어. 이기적인 변명이라 욕해도 좋아. 그래 난 이기적이었어. 나를 지키기 위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 하지만 이기적이게 굴었던 죗값을 이렇게 돌려받을지는 정말 몰랐어. 그럴 줄 알았으면 그곳을 떠나지 않는 건데, 죽더라도 너와 함께 죽는 건데.


있잖아 H, 나 너의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했어.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속이 시원할까 아니면 내가 와 주길 조금이라도 바랐을까. 사실 네가 떠난지도 몰랐어 아무도 알려 주는 이가 없더라. 이렇게까지 나에게 모질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 대상 없는 존재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어. 그래도 가끔은 안부를 전하던 우리였는데, 이상하게 답장이 없어 우연히 들어간 네 SNS에는 사진이 한 장 있었어. 작고 차가운 비석 안에 갇혀버린 네 이름, 끔찍하고 화려한 플라스틱 조화들, 웃고 있는 네 얼굴. 모든 것들이 실감 나지 않아 눈물이 나지 않았어. 스스로가 혐오스러웠어 친구가 죽었는데 울지 않는 내 모습이. 너를 보러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는데 그제야 실감이 났어. 네가 묻힌 자리도 모르는 네 가족 덕에 나는 뜨겁고 습기 가득한 여름에 미친 사람처럼 커다란 공동묘지를 한참이나 헤집고 다녔어. 한 뼘도 되지 않는 작고 축축한 땅에 네가 있었어. 잘 관리된 묘지 옆에 풀에 뒤덮인 네가 있었어. 네 커다란 눈동자가, 작은 어깨가, 청아한 목소리가 한 줌 재가 되어 그곳에 있었어. 속이 문드러진다는 기분을 이제 나는 알아.


그런데 H, 이제 너를 떠올리려 해도 점점 기억이 나질 않아. 분홍 색깔 달콤한 너의 향기도, 커다란 눈도, 청아한 목소리도 점점 잊혀져 가. 누군가가 기억들을 지우는 것 같아. 고통스러워. 나는 기억에 부주의한 사람인 걸까. 너의 기억이 너처럼 희미해질 때면, 내가 계절이 바뀌어도 너를 찾아가지 않으면, 내게 와 손을 잡아줄 수 있어? 아마 나의 손은 차가워서 너의 온도와 비슷할 거야. 요즘 따라 나라는 사람이 참 모질게 느껴져.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 일도, 잠을 자는 일도. 네가 사무치게 그리워. 가끔 꿈에라도 나와줄 수 있어? 무리한 부탁이지만 한 번만 더 나를 살려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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