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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서 Oct 24. 2022

너의 색으로 투명하게

너에게 쓰는 연서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자니 또 클리셰같이 그 아이 얼굴이 불쑥 떠오른다. 그 애로 말하자면 나보다 조금은 더 어른스러운 아이. 웃음이 말간 아이. 내 영혼의 안식.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그 애의 이름을 떠올리겠지. 그것이 싫지 않다. 그 애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봤을 땐 시기가 좋지 않았다. 나는 왠지 세상에 두려운 게 많아서, 다시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믿음을 꼭 끌어안고서 마음 한구석을 굳게 닫고 지냈다. 사실 조금은 눈치 없는 아이라 생각했다. 마음에 빈틈이 없어 혼자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날에도 자꾸만 곁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속물인 나는 대가 없는 다정을 믿지 않았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 것에 비해 그 애는 자꾸만 속을 보여준다. 그 속은 너무나 투명해서,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투명한 마음에는 그 애를 의심하는 못난 나의 얼굴만이 비칠 뿐이었다. 그럴 때면 나 자신이 부끄러워져 괜히 며칠을 연락도 하지 않고 토라져 있었다. 나도 나의 마음을 읽는 게 어려운데 그 애는 이런 나의 변덕스러운 성격이 얼마나 피곤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 애는 작고 맑은 진주알 같다. 내 마음은 이곳저곳 각져 있는데, 그 애의 마음은 동그래서, 모난 곳이 없어서, 가만두면 어느새인가 자연스레 굴러 들어와 내 마음을 톡 하고 건드린다. 그 애는 티 없는 마음과 언어로 시멘트같이 축축하고 묽은 내 마음을 동그랗게 빚어주는 도예가였다. 그 애가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들려줄 때면, 내 속에 무엇을 탄 것처럼, 응고되었던 마음이 한 올 한 올 풀어진다. 왜인지 그 애에겐 좋은 것만 주고 싶어서, 나의 불행이 전염될까 봐 두려워서, 내가 가진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다. 투명한 물에 검은 색소를 떨어트리면 혼탁한 색깔이 될까 봐. 한낱 석회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흙탕물로부터 진주를 지켜주는 조개껍질이 되고 싶은 마음. 그 애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딱 그렇다.


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중력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너를 저항 없이 사랑한다. 사람들은 남녀 간의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진리처럼 말한다. 어렸을 때는 그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너를 만나고 나서는 우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어리석은 명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진리는 우리의 우정에 있다. 우리가 쌓아온 견고하고 순수한 우정은 힘이 세서, 사람들이 말하는 바보 같은 진리를 비웃는다.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고, 그중 내가 너로 인해 믿게 된 것은 우정이라는 종교다. 아무리 그 누군가가 내게 아주 커다란 사랑을 가져온 대도 우리의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아서 나는 아마 코웃음을 치겠지. 네가 알려준 세상은 온기 가득하고 사랑이 넘쳐서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했던 나는, 너로 인해 사랑을 믿는다. 오늘도 너로 인해 자연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고, 비루한 나의 삶을 사랑한다.


거울을 보며 또 그 애의 말간 웃음을 따라 해 본다. 이제는 거울에서 그 애의 얼굴이 비친다. 사람들은 우리 둘을 보고 닮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닮은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그 애의 색이 되고 싶었을 뿐. 오늘도 내 모습에 그 애를 투영해 본다. 그럼 나는 너의 색으로 투명하게 물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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