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서 Nov 16. 2022

nostalgia

우리들의 만남 장소가 될 그 공원에서

2022.11.12 06:00 AM 잠이 덜 깬 몽롱한 얼굴로 기상한다.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딛는다. 발끝으로 서리 같은 찬기를 느끼며 이제는 머지않아 겨울이 오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잠시 허공을 바라본다. 아, 늦장 부릴 시간이 없다. 오늘은 오랜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니까.


4년 만이던가 그 애들을 보는 것은. 평소와 달리 조금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차에 탄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지금 만나러 가는 그 애들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우린 정말 어렸을 때 만났는데, 누구는 타국에서 일을 하며 지내고, 누구는 벌써 직장인이 되다니. 갑자기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참 생경하게 느껴진다. 짧은 시간 안에 바뀔 수 있는 건 정말 많구나.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에 H는 세상을 떠났구나. 뭐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하며 눈을 꼭 감는다.


잡생각을 하다가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모두를 만나러 가기 전 동네의 허름한 꽃집에 들러 H에게 줄 꽃을 몇 송이 산다. 하얀 국화가 아니어도 된다지만, 아직은 화려한 꽃을 살만큼 마음이 아물지 않았으니 아직은.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뻔한 하얀 국화를 고른다. 꽃잎이 시들어 버렸지만 제 값을 받는 꽃집 아저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인상이 찡그려졌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속아 넘어간다. 흰 국화에 담긴 의미를 부정하고 싶었던 걸까 아까보다 발걸음이 무겁다. 혹시 꽃의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 아닌지 잠시 의심을 해보았지만 이내 헛웃음을 짓는다.


우리는 꽃빛 공원에서 만났다. 앞으로 계속 우리들의 만남 장소가 될 그 공원,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차가운 무덤이 아주 많은 그 공원. 이번 여름에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혹시 몸이 액체로 변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오늘 우리는 울지 않았다. 하나의 암묵적 규칙처럼. 한 명이 규칙을 깨버리면 아마 이곳에서 밤을 지새워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아니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올게.” H에게 가벼운 인사를 전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내려가는 길에 빨갛게 물든 낙엽을 보면서 가을을 느낀다. 가을의 H.


정말 오랜 시간이 흘러 만났지만 이 아이들은 변함없이 참 한결같다. 변한 게 있다면 이제 넷이 아닌 셋뿐이라는 것. 하지만 우리의 대화 속엔 항상 H가 있어 빈자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대화 주제는 항상 중학생 시절에 머물러 있다. 만날 때마다 매번 같은 이야기이지만 어쩐지 참 질리지 않는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괜히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늦은 후회를 해보기도, 그때의 나를 안쓰러워해보기도 한다.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어떤 삶이든 참 평범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고. 내가 떠나지 않았다고 H가 지금 이곳에 같이 앉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나의 오만함이다. 완전히 잠겨버리기 전에 생각의 바다에서 급히 빠져나온다. 너무 깊은 생각은, 때늦은 후회는 어쩔 때는 독이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돌아와 마저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모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커피가 아닌 매일 마시던 싸구려 핫 초코가, 십 대의 얼굴이 되어있다. 시궁창 같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걸까. 혹은 단순히 노스탤지어일까.


아, 정말 마지막으로 때늦은 후회를 하나 해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머리가 아파 일찍 간다던 H를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둘걸 그랬다.

작가의 이전글 너의 투명한 바리케이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