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숙소 이야기 1(보편적 스테이와 슬로비사장님의 배려 콤보)
버스가 그냥 지나갔다. 통영에 내려온 지 6일째, 처음으로 화가 났던 날이었다.
가장 먼저, 버스의 뒤꽁무니를 보며 허탈했다. 버스 배차 간격이 거의 3-40분에 한 대씩 오기 때문이었다. 정류장이 간소해서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손까지 흔들었는데 야속하게 쌩 하고 지나가버렸다. 허탈함의 다음 단계는 분노였다. 책무를 소홀히 한 기사님께 화가 났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욕을 했다. ‘아니 버스가 빨리 달리면 단가?’ ‘하루에 몇 대 다니지도 않는 버스가 손님도 안 태우면 운행은 왜 하지?’ 이하 기타 등등… 좀 시원해졌다.
택시를 탈까? 숙소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어제 본 근처의 카페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전화가 와서 받으니 숙소 사장님이셨다. 혹시 방금 버스 놓치셨냐고. 근처에서 지켜보고 계신가 두리번거렸는데, 사장님 동생 분께서 차를 타고 지나가시다가 내가 버스를 놓치는 장면을 보셨다고 한다.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련하고 다급했던 손짓과 잠시 망부석처럼 서있었던 모습을 누군가 직관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했다.)
너무 감사하게도 근처에 가는 길이면 태워다 주시겠다고 했는데, 가려고 하는 곳이 거리가 꽤 되어서 그냥 근처에 카페를 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장님 동생분이 그 카페 사장님이었다.
통영의 바다가 보이는 숙소들은 뚜벅이 여행자들이 가기 힘든 곳들이 많다. 그중 버스정류장이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조용한 바다 마을을 알게 되었다. 세포마을이다. 하필 또 유미의 세포들에 푹 빠진 터라 세포마을이라는 이름에 더 혹했다.
세포마을을 조망하며 산책할 수 있고, 버스로 뚜벅이 여행자들도 쉽게 올 수 있는 곳. ‘보편적 스테이’를 한 달 살기 숙소 중 하나로 선택했다. 장기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로 1인이 여행하면서 묵기 좋은 원룸형 숙소이다.
세포마을의 호랑이가 살았다는 범왕산 자락 버망골에 위치한 보편적스테이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는 카페 슬로비는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이다. 보편적스테이 사장님의 동생분이 운영하시는 곳이기도 하다.
슬로비 사장님 말씀으로는 보편적스테이와 슬로비는 경쟁 적 우호 관계에 있다고 하셨고, 슬로비의 카페의 매니저님은 슬로비 사장님과 보편적스테이 사장님의 운영 방식은 완전 반대라고 말씀해주셨다.
보편적스테이는 1인 장기 여행자들을 위한 조용한 원룸형 숙소, 슬로비게스트하우스는 여행자들의 교류에 힘쓰는 커뮤니티형 숙소이다. 경쟁적 우호관계는 두 사장님의 형제 관계에서 기인하며 덕분에 카페 음료 할인을 10%나 받을 수 있었다.
보편적스테이는 방 안에 이용 안내 글이 있는데, 그 글의 앞면에 있는 슬로건이 인상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우리도 괴롭지 않은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이용수칙이 자세하고 섬세해서 숙소 안에서의 규칙, 숙소 밖에서의 정보를 한 번에 다 습득할 수 있었다. (사장님이 엄청 꼼꼼하신 분이신 것 같았다.)
꼼꼼하신 사장님 덕분에 방 컨디션이 굉장히 관리가 잘 되어있고 깨끗했다. 침구류도 여름용 얇은 이불이라 시원하고 좋았다. 미니 냉장고, 옷걸이, 옷장, 올레 티비, 에어컨, 미니 선풍기, 거울 등이 방안에 다 구비되어있다.(작아도 필요한 건 다 있는 합리적인 숙소!)
장기 여행자들을 위해 옥탑에는 공용 공간이 있다. 루프탑에서는 세포마을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고, 공용 주방에서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 간단한 무인 매점에서는 라면과 밥 등을 살 수도 있다.
통영에서 지내면서 많은 사장님들의 사람 냄새가 나는 부분에 끌리고 있는데, 오늘은 슬로비 사장님과 보편적스테이 사장님의 걱정과 배려로 버스 아저씨와의 에피소드를 즐거운 해프닝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 같다.